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기역과 지읒의 차이 하나로 아주 다른 뜻을 가지는 두 단어, 거울과 저울. 이런 어휘가 우리말에는 차고 넘친다. 겨울과 여울, 장마와 악마, 선발과 후발, 밥상과 책상. 이런 본보기는 거의 무한대다. 하지만 나는 거울과 저울의 상관성에 관해 생각하고 싶어진다. 왜냐면 거울과 저울 양자가 우리 시대의 단면 가운데 하나를 적실하게 보여주기 때문이다.

“거울아, 거울아! 세상에서 누가 제일 예쁘니?!” 익숙한 질문이다. 백설공주(白雪公主) 의붓어미가 마법의 거울에 던지는 질문이다. 그녀가 물어볼 때마다 거울은 백설공주라고 답한다. 여기서 중요한 수식어는 ‘예쁘다’가 아니라, ‘제일’이다. 새 왕비를 괴롭히는 것은 예쁘지 않다가 아니라, 제일 예쁜 여성은 그녀가 아니라는 사실이다. 거울이 어떤 기준으로 백설공주를 최고의 미녀로 지적하는지 우리는 모른다.

문제는 왕비에게 있다. 왜 그녀는 자신과 자신의 아름다움을 믿지 아니하고, 사물에 불과한 거울의 판정에 괴로워해야 하는가. 나는 그것이 늘 궁금했다. 그녀가 문제를 풀어나가는 방법도 지나치게 노골적이고 폭력적이다. “너 죽고 나 살자”라는 막가파 혹은 일방주의적인 방식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을 죽여서라도 ‘제일’ 예쁜 여자가 되려는 욕망에 살인도 마다하지 않는다. 경천동지(驚天動地)할 일이다.

저울은 무게를 재는 데 유용한 도구다. 수량을 판단하는 기준 가운데 길이를 재는 것이 자요, 무게를 재는 것이 저울이다. 길이와 무게는 눈금으로 표시되는 까닭에 주관적인 판단이 개입할 가능성이 아주 작다. 눈금을 속이는 고수(高手)들도 있지만, 요즘 같은 대명천지에 저울눈을 속이는 담대한 자는 찾기 어렵다.

저울 가운데 상징적으로 쓰임새를 과시하는 형상은 대법원에 있는 정의의 여신이 들고 있는 저울일 것이다. 여신은 왼손에는 법전을, 오른손에는 저울을 들고 있다. 법에 따라 재판하겠다는 의지를 보여주는 게 법전이다. 판검사나 변호사의 욕망과 의지가 아니라, 법전에 나와 있는 그대로 재판에 임하겠다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에 저울은 법 앞에 모두가 평등하다는 의미를 표현한다.

문제는 저울의 그와 같은 의미가 현실에서 작동하고 있는지 하는 것이다. 우리는 1988년에 지강헌이 남긴 기막힌 명제 ‘유전무죄 무전유죄’의 마법에서 아직도 자유롭지 못하다. 한 세대 넘도록 금전과 금권의 위력이 한국 사회를 휘어잡고 있다. 법과 정의는 여전히 가진 자들 편에 있으며, 사회적 약자와 빈자들의 고통은 무시당하고 있다.

거울은 주관적이며 자의적이고 편향적인 성격을 가진다. 오목거울과 볼록거울에 비친 상은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비뚤어진 거울은 대상의 온전한 모습이 아니라, 왜곡된 형상을 구현한다. 그런데 객관적이며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저울도 그것을 사용하는 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얼마든지 변질(變質)될 수 있다는 점에 우리의 곤혹이 있다. 이질적인 양자를 사유하면서 우리 사회에 만연하고 있는 ‘내로남불’을 새삼 돌이켜본다. 밤벌레 울음소리 깊어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