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브레히트 뒤러 ‘자화상’

서양미술사를 지역적으로 구분할 때는 대개 알프스 산맥이 기준이 되어 이탈리아를 알프스 남쪽 독일이나 프랑스, 네덜란드와 벨기에의 옛 이름 플랑드르 지역을 알프스 이북이라고 부른다. 종종 미술사 관련 책이나 글을 읽다보면 르네상스 미술을 설명하는 중에 북유럽이라는 명칭이 언급되곤 한다. 이때의 북유럽은 지금 우리가 이해하는 스칸디나비아 지역이 아니라 알프스 북쪽에 위치한 서유럽 국가를 가리키는 것이니 유의할 필요가 있다.

중세의 뒤를 잇는 르네상스는 15세기 초 이탈리아에서 시작되었다. 이탈리아의 여러 도시들 중에서 르네상스의 발상지는 꽃의 도시 피렌체이다. 수많은 천재들이 이탈리아에서 미술의 역사를 새롭게 전개해 가고 있을 때 알프스 너머 북쪽 지역의 미술을 지배했던 것은 중세적 전통이었다. 알프스를 사이에 두고 같은 시기 남쪽과 북쪽 지역의 미술가들은 서로 다른 시대를 살고 있었던 것이다. 알프스 북쪽 지역의 르네상스는 이탈리아 보다 대략 100년 늦은 1천500년 전후이다.

알프스 이북에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전파한 인물은 독일 뉘른베르크 출신의 알브레히트 뒤러(1471∼1528)이다. 회화는 물론이고 특히 탁월한 판화로 명성이 자자했던 뒤러는 1494∼1495년과 1505∼1507년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을 통해 미술의 중심 도시들을 두루 다니며 현지 거장들과 친분을 쌓으며 르네상스 미술을 깊이 받아들였다. 이탈리아로의 먼 길을 떠나면서 뒤러는 그가 머물렀던 마을의 모습이나 실제 풍경을 수채화에 담기도 했다. 상상이나 허구가 아니라 실제로 본 풍경을 주제로 한 서양미술사 최초의 작품들로 풍경화라는 장르가 아직 존재하지 않았던 시대에 그려져 미술사적 가치가 더욱 크다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뒤러가 두 번에 걸친 이탈리아 여행에서 배운 것은 무엇일까? 그가 경험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어떤 것이었을까? 그에게 익숙했던 그림들과 이탈리아 화가들의 그림은 어떻게 달랐을까? 중세와 르네상스 미술의 가장 큰 차이는 자연과 대상을 대하는 태도에 있었다.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눈으로 보고, 과학적으로 실험하고, 논리적으로 분석한 후 작품을 제작했다. 설득력 있는 공간을 묘사하기 위해 수학적으로 계산된 원근법을 발명했고 정확한 인체 묘사를 위해 근육의 움직임을 섬세하게 분석했을 뿐만 아니라 해부학을 통해 몸의 구조를 밝혔다. 이 모든 것이 의심의 여지없이 알프스 너머에서 온 뒤러에게 경이로운 것으로 여겨졌으리라. 그런데 뒤러가 가장 놀랍게 여긴 것은 다른 것이었다. 격이 다른 이탈리아 미술가들의 사회적 신분이다.

중세동안 미술가들은 수많은 걸작들을 남겼지만 대부분 이름 없이 사라졌다. 이름으로 기억될 만큼 가치 있는 존재로 여겨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고대로부터 중세에 이르기까지 미술가의 행위는 창작이 아니라 육체노동으로 여겨졌다.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가들의 위대한 발견 근저에는 기필코 자신들이 남긴 작품이 보잘 것 없는 노동의 결과가 아니라 학식과 정신작용을 통한 창작이라는 것을 증명하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고 그들의 소원은 이루어졌다. 여전히 중세를 살았던 뒤러에게 귀족들에게 초대되어 함께 식사를 즐기며 지체 높은 학자들과 서슴없이 지적 대화를 주고받는 이탈리아의 분위기는 큰 충격을 안겨주었을 것이다.

독일 뮌헨 알테 피나코테크에 소장된 뒤러의 초상화는 뒤러가 첫 번째 이탈리아 여행을 마치고 돌아 온 후에 그려진 것이다. 어두운 배경 위로 금발의 곱슬머리를 한 뒤러의 모습이 나타난다. 굳게 다문 입술과 정면을 응시하는 두 눈은 자존감으로 충만해 있다. 흡사 예수 그리스도의 모습처럼 보이기도 한다. 이탈리아나 그밖에 어떤 거장들도 뒤러에 앞서 감히 이처럼 자신에 차 있는 자화상을 남긴 적이 없다. 뒤러의 자화상이 그 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의 자화상은 한 미술가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념비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에 대한 미술가의 요청으로 읽혀질 수 있다. /김석모 미술사학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