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규열 한동대 교수
장규열 한동대 교수

‘목줄미착용을 엄금합니다’ 반려견과 함께 산책하는 사람들이 더러 스치는 길목에 걸린 현수막이다. 애견에게 목줄을 반드시 착용시켜 달라는 호소였는데, 부정(否定) 표현을 거듭 보면서 잠시 헷갈리고 말았다. 그냥 ‘목줄을 꼭 맵시다’라고 했으면 금방 알아채지 않았을까.

새 대통령이‘반지성주의’를 경계하며 민주주의의 위기를 지적했다. 반지성주의(Anti-intellectualism)는 누가 시작했을까. 지성을 반대하고 생각하기를 싫어하여, 사람들의 의견과 담론이 파묻힐 터에 과연 민주주의는 신음할 게 아닌가.

그는 과연 그런 뜻으로 ‘반지성주의’를 이야기했을까. 역사학자 호프스태터(Richard Hofstadter)가 처음 썼다는 이 표현은 ‘집단이나 개인의 광기에 따라 정상적인 지적사고의 발현을 금기시하고 부정하는 태도’ 정도로 이해된다.

반공사상을 기치로 1950년데 미국을 휩쓸었던 매카시즘(McCarthyism)과 독일의 히틀러가 선동을 거듭하며 반대세력을 악마로 지칭하며 사회를 혼란에 빠뜨렸던 반지성의 사례로 기억된다. 진시황의 분서갱유와 마오쩌둥(毛澤東)의 문화혁명도 독재와 전횡을 공고히 하고 집단의 논리로 다양한 사상의 발현을 억제한 사례가 아니었을까.

오늘 우리들 생각의 텃밭은 어떠한가. 경제적 양극화가 심각하지만, 생각과 관점의 양극화는 위험한 수준을 이미 넘었다. 누구를 만나도 ‘당신은 어느 편인지’ 살피게 되고 내 편이 아니면 차단하고 돌아서는 게 일상이 되었다.

디지털과 온라인은 내게 편안한 사람들만 친구로 삼는 습관을 더욱 굳히고 있다. 다른 생각에는 눈도 돌리지 않아 그들이 무엇 때문에 다르게 생각하는지 묻지도 않는다. 한 켠의 논리로만 판단하고 다른 편의 의견은 거들떠도 보지않는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정치권은 이를 극복하거나 수정하기 보다는 이용하면서 표대결로만 몰아간다. 양쪽을 함께 견주며 이성적인 판단에 이르러야 하는데, 정상적인 사고와 판단이 집단과 진영의 구호에 묻히고 만다.

반지성주의는 극복함이 옳다. 켜켜이 쌓인 민중의 생각이 드러나야 하고 다양한 의견들이 담론의 장에 당당히 올라와야 한다. 토론과 주장이 맞서는 가운데 더 나은 지향점이 발굴되어야 하고 보통 사람들의 풀뿌리 정서가 존중되어야 한다.

누구도 공론장을 휘어잡지 말아야 하고 공평무사한 시민민주주의가 구현되어야 한다. ‘반지성주의’를 고안했던 호프스태터 본인마저 정의상 애매한 용어임을 자인하였다고 한다. 부정이 부정을 낳는 혼돈의 연속을 경험했을 터이다. 민주주의를 실현함에 있어, 반지성주의를 부정하느라 씨름하기 보다 올바른 지성을 일깨우는 데 집중했으면 한다.

더 넓게 보고 더 깊이 생각하는 대통령을 경험하고 싶다. 모두가 어울리며 더불어 행복한 나라를 만나고 싶다. 편을 가르면서는 한 발짝도 더 나아가지 못한다. 반지성주의를 극복하기는 커녕 자칫 그 덫에 빠질 위험이 더욱 높다. 대통령도 국민도 상대에게 더 많이 관대해 졌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