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음력 4월 8일인 어제는 ‘부처님 오신 날’이었다. 올해가 2,022년이고, 불기(佛紀)로는 2,566년이기에 고타마 싯다르타는 기원전 544년에 태어난 셈이다. 도이칠란트 철학자 칼 야스퍼스는 1949년 <역사의 기원과 목표>에서 ‘축의 시대’라는 개념을 창안한다. 기원전 800년부터 기원전 200년까지 유라시아에 걸출한 사상과 종교가 동시다발적으로 출현했다는 것이다.

놀라운 발상이자 탁월한 지적이 아닐 수 없다. 춘추전국시대 중국에서 공자를 비롯한 제자백가가 등장하고, 인도에는 우파니샤드 철학에 바탕을 둔 자이나교와 불교가 출현한다. 중앙아시아에는 배화교(拜火敎)를 창시한 조로아스터(차라투스트라)가 등장하며, 근동에서는 히브리 선지자들이 유대교의 가르침을 예비한다. 그리스에서는 탈레스와 피타고라스 같은 자연 철학자와 소크라테스를 비조(鼻祖)로 하는 아티카 철학이 나타난다.

인공지능 로봇과 드론의 21세기에도 이들의 가르침은 강력한 위력을 발휘한다. 과학기술문명의 시대에도 우리는 2,000년 선각자들의 가르침에 의지해 살아간다.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가 사상과 종교다. 종교와 사상의 가르침과 깨달음에 의지해서 우리는 인간성과 품위, 가치와 미덕, 선과 정의를 아침저녁으로 사유하면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최고의 깨달음을 얻은 ‘붓다’ 말씀 가운데 ‘탐진치 삼독(三毒)’이 특히 폐부를 찌른다. 탐욕과 분노, 어리석음의 세 가지가 인생을 망치는 주범이라는 게 붓다의 가르침이다. 이들 세 가지는 세 마리 새끼돼지처럼 한 묶음으로 뭉쳐 다닌다. 탐욕에 사로잡혀 욕망을 실현하지 못하면, 우리는 분노의 차원으로 이동한다. 분노를 억제하지 못할 경우, 우리는 다시 어리석은 행동으로 향한다. 지극히 명약관화한 연쇄반응이자 인과(因果) 법칙이다.

이 세상 누구에게나 나름의 욕망이 있다. 욕망이 없는 사람은 절정의 수도승이거나, 절반 죽은 사람 내지 광인(狂人)일 것이다. 문제는 욕망의 제어 정도에 있다. 욕망이 욕망과 충돌하면 강렬한 파찰음과 불화의 굉음이 터져 나온다. 요즘 한국 사회를 들여다보면 폭발 직전의 거대한 시한폭탄이 째깍거리는 듯하다. 남녀와 세대, 부자와 빈자, 지배계층과 피지배계층 사이의 갈등과 알력이 최고조에 달한 느낌이다.

하나의 궤도(軌道) 위를 마주 보고 달리는 두 대의 열차가 정해진 충돌 시각에 맞춰 질주하는 살풍경을 나는 오늘도 예감하고 있다. 그 모든 것의 근저에 ‘탐욕’이 자리한다. 욕망을 넘어선 탐욕, 특히 물질을 향한 욕망이 괴기스러울 정도로 거대하다.

영화 ‘스파이더맨’ 연작에 등장하는 각종 괴물이 한반도 남단에 총출동해 있다는 불길한 느낌이 비단 나만의 감촉일까?! 어째서 우리는 탐욕의 열차를 멈추지 못하고 충돌을 향해 곧바로 직진하고 있는 것일까?!

이 나라의 수많은 민초(民草)의 넉넉함과 선량함과 달리 탐욕을 부추기는 정치인들과 언론인, 일부 권력자들의 행악질을 통렬하게 경고하고 그들을 퇴출하지 않으면 우리 공동체에 적신호가 켜질 것은 자명하다. 부처님 오신 날에 전하고자 하는 나의 낮은 목소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