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모친 칠순 잔치를 한답시고 이것저것 준비에 한창이던 후배 하나가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 것이었다. 무슨 일인가 물으니, 딸은 그냥 딸인가 보다 하는 뜬금없는 소리를 하며 한숨을 내쉬는 게 아닌가. 어려서부터 아들 아들 하던 모친이, 이번 칠순 잔치에도 아들이 돈을 더 많이 쓸까 노심초사하고 오히려 딸에게는 은근히 더 했으면 하는 뉘앙스에 그만 맘이 상해 버렸다는 것이다.
옛말에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 없다는 말이 있다. 이는 자식들을 모두 골고루 사랑하는 부모의 마음을 표현한 속담이다. 그런데 한편, 더 아픈 손가락도 있고 덜 아픈 손가락도 있다며, 부모의 자식 사랑이 모두에게 똑같진 않다고 반발하는 이들도 있다. 옛날 같으면야 대를 이을 아들을 못 낳으면 소박맞기도 했고 또 아들은 출가외인인 딸과는 달리 제를 지내주기도 하고, 남편 사후 의지해야 할 대상이기도 했으니 그렇다 치더라도 요즘에는 상황이 그렇지 않은 데도, 아들 아들 하면 딸들로서는 속상할 법도 하다.
그런데 사실 부모에게는 어떤 손가락이든 중요하지 않은 손가락이 없다. 부모에게 있어 자식은 더 아프고 덜 아픈 손가락이라기보다는 각각 다른 기능을 하는 손가락일 가능성이 크다.
‘나 혹은 네가 최고’라고 하거나 반대로 아래로 내려 형편없음을 야유할 때 사용하는 엄지, 방아쇠 당기는 흉내 낼 때 혹은 남을 향해 삿대질 할 때 필요한 검지, 가장 길고 아름답게 뻗어서 손의 미학을 완성시키는 중지, 약혼 반지를 끼울 때 꼭 필요한 약지, 그리고 손가락 걸고 약속을 맹세할 때 사용되는 소지처럼 말이다.
즉 상황에 따라 이 손가락 저 손가락이 생각나는 것이지, 모든 손가락이 부모에겐 다 소중한 것이다. 모든 손가락이 소중하다면, 이를 똑같이 대하는 것은 더더욱 중요한 문제이다.
손가락이 부모에게 자식과도 같듯이, 임금에게는 신하 및 백성과도 같고, 스승에게는 제자와도 같다. 무릇 부모된 자, 임금된 자, 스승된 자들은 모든 손가락을 골고루 살피고, 그중 아픔이 있는 손가락을 특별히 더 돌보되 다른 손가락을 무시하지 않고 함께 보듬어 안는 지혜를 갖추어야 한다. 소외된 손가락이 없도록, 옛 임금들은 궁궐을 빠져나와 잠행(潛行)을 하며 시정을 살폈고, 딸이라고 차별않고 아들과 동등하게 교육을 받게 한 부친 덕에 난설헌은 당대 최고의 여류 시인이 될 수 있었으며, 10세에 겨우 글을 깨칠만큼 우둔한 아들이었건만 꾸준히 지지해 준 부친 덕에, 김득신은 조선조 유명 시인이자 독서광으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바야흐로 설 연휴가 코앞이다. 항상 명절 때 단골로 나오는 뉴스 중 하나는 집안끼리의 불화, 싸움, 형네, 아우네 시시콜콜 재산 문제로 언성을 높이다가 즐거워야 할 명절이 아수라장이 되는 기삿거리다. 부디 이번 명절에는 다들 손가락들과 손가락을 생각하는 마음이 잘 조화를 이루어, 가위, 바위, 보 게임을 하거나 등이 가려워 긁을 때, 악수를 할 때나 손뼉을 칠 때처럼 하나된 마음의 ‘손’이 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