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나무 이야기
세계 50대 명품 트레킹 장소로 소개된 ‘울진 금강송면 소나무숲길’
산림청 조성 ‘전국 1호 숲길’로 곧게 뻗은 소나무 절경 등 전국 으뜸
한국 가장 오래된 나무는 수령 5∼6천년 된 ‘울릉도 도동리 향나무’
불과 50년 전엔 황폐한 민둥산 대부분… 故 현신규 박사 산림보호 앞장

울진 금강소나무숲 1280만 그루의 소나무가 빽빽하다. /한국관광 100선, 울진군 금강소나무 숲길

우리 주위에는 나무가 참으로 많다. 나무를 빗댄 노래도 많고, 문학 작품도 수두룩하다. 그 뿐인가. 상상 속의 나무를 가져와 민초들의 꿈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판타지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도 한다.

외가가 있었던 경상남도 창녕군 모전마을의 입구에는 커다란 나무가 있었다. 까막눈이 시절 기억에 모전 마을 나무에는 색색이 종이를 매단 기다란 줄이 감겨 있기도 했고, 특별한 날에는 오래된 한복을 입은 마을 어르신들이 나무를 향해 수차례 절을 올리기도 했다. 모르긴 몰라도 모전 마을의 나무는 수백년 이상 살아온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외할아버지도 할아버지의 할아버지에게 ‘나무 등을 타고 놀았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했으니 말이다. 그도 그러한 것이 마을 저수지의 머릿구에 서 있는 나무는 생명력 없는 검은 색깔을 가지고 있지만, 여름 한 철에는 녹색잎을 토해내기도 했다.

「예전에는 아이가 태어나면 나무를 심었다. 여자 아이가 태어나면 오동나무를, 남자아이가 태어나면 소나무를 심었다. 딸아 자라 시집갈 때가 되면 그 오동나무를 베어 가구를 만들어 혼수로 보냈다. 소나무는 아들과 평생을 함께 하다가 생을 마감할 때가 되면 베어 관을 짜는데 썼다. 아이들마다 각각 내나무가 있었다. 이처럼 내나무는 나의 탄생과 더불어 나와 숙명을 같이하고 죽을 때에는 더불어 묻히는 존재였다. (이규태 수필 ‘내나무’ 가운데)」

□ 울진 금강송면의 나무

나무에 대한 아련한 기억을 품고 울진의 금강송면을 찾았다. 왕피천의 물줄기를 따르다 보면 멀리서 울창한 나무의 모습을 볼 수 있다. 울진군 북서부에 있는 금강송면은 본래 서면으로 불렸다. 하지만 2015년 4월 금강송면으로 개칭됐다. 면의 전 지적이 태백산맥에 속하여 500~1천m 이상의 험준한 산지를 이룬다. 한참의 시간을 걸려 금강송면에 있는 소나무숲길로 들어섰다.

“울진 금강송면의 소나무숲길은 미국 CNN에서 선정한 세계 50대 명품 트레킹 장소에도 소개됐었죠.”

한 관계자의 이야기처럼 곧게 뻗은 소나무 가지들은 마치 길을 들어서는 사람들에게 인사라도 하는 마냥 의연하기만 하다. 울진군 등에 따르면, 금강송면의 소나무숲길은 산림청이 국비로 조성한 전국 1호 숲길이기도 하며,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되어 있다. 어찌보면 우리나라에 트레킹과 둘레길에 많은데, 그중에서 으뜸으로 치는 곳이 바로 금강소나무숲길이 아닌가 한다.

「태백산맥줄기를 타고 금강산에서 울진, 봉화와 영덕, 청송일부에 걸쳐 자라는 소나무는 주위에서 흔히 보는 꼬불꼬불한 일반 소나무와는 달리 줄기가 곧바르고 마디가 길며 껍질이 유별나게 붉은데, 이 소나무는 금강산의 이름을 따서 금강소나무(金剛松) 혹은 줄여서 강송이라고 학자들은 이름을 붙였으며, 흔히 춘양목(春陽木)이라고 알려진 나무이다. 결이 곱고 단단하며 켠 뒤에도 크게 굽거나 트지 않고 잘 썩지도 않아 예로부터 소나무 중에서 최고의 나무로 쳤다. 경북 울진군 서면 소광리 금강소나무 집단 분포지는 숙종 때 황장봉산으로 지정 관리하였으며, 1959년 육종림으로 지정된 후 2001년 산림유전자원보호림으로 지정할 정도로 유명한 숲으로 금강소나무 미인송(520년 된 할아버지 소나무)이 있는 지역으로서 특별 보존 관리하고 있는 청정지역이다. 500년이 넘은 천연수림의 소나무 터널을 통과하면서 금강소나무들의 열병 사열을 받아 볼 수 있다. 소나무 숲이 품어내는 식물성 호르몬인 피톤치드도 느껴볼 수 있다.(한국관광공사 ‘대한민국 구석구석’ 중에서)」

그 중에서도 금강송면의 유명한 나무는 무엇이 있을까. 우선 천연기념물 제408호인 산돌배나무가 있다. 금강소나무숲길 2구간인 ‘한나무재길’을 걷다보면 만날 수 있다고 한다.

“닥발골에서 또 한모퉁이 돌아서면 쌍전리 산돌배나무가 있는 큰닥발골이죠. 현재 우리나라에 있는 산돌배나무 중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나무로 생물자원으로서의 보존가치가 커요. 수령이 약 250년이고, 높이 25m, 가슴높이 4.3m죠.”

또 금강소나무숲길 3구간인 ‘오백년소나무길’에는 소광리 금강송 군락지를 볼 수 있다. 이곳은 우리나라 최대의 금강소나무 군락지다. 오랜 시간을 지나면서 일제강점기의 엄청난 금강송 수탈에도 훼손되지 않았다. 남아 있게 된 가장 큰 이유는 이곳이 산이 깊고 교통의 오지였기 때문이다. 그런가 하면 ‘병정소나무’도 있다. 6대의 아름드리 금강소나무가 한 줄로 서 있는 모양이 병정들이 정령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병정소나무’라 부른다. 과거 송진채취로 인한 아픈 흔적이 남아 있다.

금강소나무숲길 4구간인 ‘대왕소나무길’에는 수령이 600년으로 추정되는 대왕소나무수종이 남아 있다. 아쉽게 볼 수는 없었지만, 사진으로 보는 자태는 커다란 충격으로 다가왔다.

 

울릉도 도동리 향나무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울릉도 도동리 향나무 :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

□ 한반도와 나무 그리고 사람

갑작스레 궁금증이 일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나무는 어디에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생각외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추정되는 나무는 울릉도에 있었다. 경북 울릉군 도동리 산8, 도동향뒤 바위산 중턱에 위치한 향나무는 수령이 2천500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 나아가 지난 2018년 울릉군발전연구소는 “도동리 향나무의 나이테를 조사한 결과, 5천~6천년으로 추정된다”고 하기도 했다. 이어 강원도 삼척시 도계면 늑구리 210-2에 있는 삼척 늑구리 은행나무는 수령 1천500년을 자랑한다.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 은행나무와 부부 사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한반도의 산과 들에 지금처럼 나무가 많았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일부 사유지를 제외하고는 민둥산이 대부분이었다는 것이 어른들의 이야기다.

흔히, 나무가 없어 붉게 토양이 드러난 벌거숭이 산을 ‘민둥산’이라고 부른다. 사실 국토의 65% 가량이 산림인 우리나라에 민둥산이 펼쳐지던 시절이 있었다. 우리 국토에 산림 황폐화가 진행된 것은 조선시대 말부터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오랜 기간 동안 화전(火田)으로 인한 산림 훼손과 온돌을 사용하는 가옥구조로 인해 나무를 땔감으로 쓸 수밖에 없었고, 이후 일제가 목재를 수탈할 목적으로 그나마 남아있는 나무들을 마구 베어가면서 상황이 더욱 나빠졌다. 또 6·25전쟁을 겪으며 험난한 전투 속에서 산림의 황폐화는 더욱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산림 황폐화는 조금만 비가 와도 산사태와 홍수로 이어졌고, 약한 바람에도 황토먼지가 날리며, 비가 오지 않으면 금방 가뭄이 드는 일로 이어졌다. 산속에는 새와 동물이 점점 사라져 생태계도 망가졌다. 하지만 여기 우리나라의 민둥산을 산림이 우거진 산으로 바꾼 인물이 있었다.

“평생을 나무하고만 살아왔다. 그러다 보니 나무는 내 삶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됐고 내가 나무 속에 있는지 나무가 내 속에 있는지조차 모를 느낌이 들 때가 많다.”

한국이 낳은 세계적인 임목육종학자 고(故) 현신규 박사(1911~1986)가 생전에 남긴 말이다. 그는 일본의 수탈과 6·25전쟁을 거치며 황폐해진 조국의 모습을 보며 안타까워했다. 이에 척박한 땅에서도 잘 자라는 ‘리기테다소나무’, 한국 토양에 잘 맞는 포플러나무인 ‘은수원사시나무’를 육종해 산림을 다시 푸르게 하는 데 기여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1979년 국토 녹화에 공헌한 현 박사의 공덕을 기리기 위해 은수원사시나무에 그의 성을 따서 ‘현사시나무’라는 이름을 붙였다.

1911년 평안남도 안주군에서 태어난 현 박사는 철학이나 문학을 전공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를 서울대 농과대학 전신인 수원고등농림학교에 입학시켰다. 이후 일본 규슈대 임학과를 졸업하고 서울에 있는 조선총독부 임업시험장에서 연구직으로 일했다. 산림조사에 나갈 때마다 헐벗은 숲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낀 그는 다시 규슈대 박사과정에 들어갔지만 1945년 전쟁 막바지 한국인으로서 신변에 위협을 느껴 귀국해야 했다. 이후 수원농업전문학교에서 조교수로 교편을 잡으며 연구자료를 정돈해 규슈대로 보냈고, 1949년 한국인 최초로 임업 분야 박사학위를 받았다. /박순원기자 god02@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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