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현태수필가
조현태
수필가

코로나19 사태가 아직 진정되지 않고 있어도 우리 고유의 명절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명절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것이 가족이다. 아무리 직계존속 관계라 하더라도 각자의 삶에 따라 생활공간이 다르니까 명절에 가족이 만나고 싶은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그런데 오늘 하고 싶은 말은 가족이 분명한데도 가족이 아닌 경우다. 예컨대 부부가 아이를 낳고 살다가 이혼하였다. 이혼할 때 친권을 포기한다면서 아이 양육권을 아버지에게 넘겼다. 그래서 아버지가 아이를 키웠고 재혼은 하지 않았다.

문제는 자식이 먼저 사망하게 되었는데 장성한 자식에게 제법 많은 재산이 있었다. 갑자기 죽었으므로 사망 후 재산의 처리에 대해서는 언급한 것이 없었다. 그러니까 법적으로 망자의 유산은 직계가족에 우선권이 주어지므로 어머니였던 사람이 재산 소유권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즉 망자의 자식은 없어도 부모는 살아있으니 어머니인 자신의 몫을 찾아가겠다는 것이다.

친권과 양육권도 포기하고 이혼하였으나 어머니와 아버지가 없으면 자식이 있을 수 없다는 천륜을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결국 우주의 이치를 인간이 만든 법으로 바꾸지는 못한다는 주장이다. 사람이 사회를 이루고 살면서 법도 중요하고 법을 초월하는 이치도 중요하다. 어느 한 쪽을 무시하지도 못하지만 개인의 양심이 올바르다면 법보다 이치에 더 의지하고 싶어지는 것이 사실이다. 왜냐하면 양심적 이치를 따르지 않으려는 사람 때문에 법이 생겼으니까.

이런 경우 유산을 어떻게 처리할 것인지에 대한 답은 망자에게 물어봐야 안다. 누가 유산의 얼마를 갖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주장하는 사람의 진정한 의도다. 그 의도가 가족 개념보다 재산에 치중해 있다면 법의 설명도 달라질 수 있지 않을까.

사람이 사는 세상은 사람답게 판단하고 인간적 양심을 지켜야 좋은 세상일 것이다. 욕심도 돈도 사람의 세상에 필요한 것이긴 하지만 너무 집착하다보면 스스로 노예가 될 뿐이다. 누구인들 노예가 되려고 그리하겠는가마는 돈에서 자유로워지니 세상이 이만큼 편한 것이 있을까 싶다. 혹자는 나를 보고 ‘너는 가난하고 빚도 없으니 그런 맘을 먹지만 빚이 많다보면 가진 것이 늘 부족한데 어찌 돈을 피할 수 있나?’하면서 부정한다.

어디에도 길은 없지만 어디에도 가면 길이 된다는 말이 떠오른다. 돈에 초연해지는 길이 따로 없다. 그래도 초연하면 초연해 지는 게 아닐까. 나만의 길도 길은 길이니까.

가족보다 더 기막힌 사연 때문에 자식과 남편 같은 가족에게서 떠났을 수도 있겠지. 하지만, 가족보다 돈을 택하여 다시 가족의 자리로 돌아오고 싶다면 먼저 가족의 승낙이 따라야 할 일이다. 그래야 재산 분배도 가능해 지겠지만 자식 잃은 아버지가 돈에 눈먼 사람을 아내로 인정해 줄지는 아무도 모른다.

코로나19로 썰렁한 명절이지만 애틋하고 그리워 만나는 가족이기를. 도타운 정을 나누고 서로 용돈이라도 주고 싶은 가족이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