뒷산에 생강나무꽃이 노란 꽃을 터트리면, 매화, 개나리, 진달래…, 산과 들에는 순서를 기다렸다는 듯 줄지어 들꽃이 피어난다. 만화방창 봄꽃이 한바탕 잔치를 벌이고 나면 여름꽃이 듬성듬성 벙근다. 가을이면 늦을세라 이질풀, 쑥방망이, 구절초, 국화가 한 시절 만발한다. 겨울이면 산에는 눈꽃이 피고 우리집 유리창에는 성에꽃이 핀다.

긴산꼬리풀, 두메고들빼기, 갈퀴현호색, 선괭이눈, 매발톱, 뱀톱, 모싯대, 노랑갈퀴, 층층이꽃, 큰까치수염, 큰뱀무, 노랑투구꽃, 고깔제비, 각시붓꽃, 가래수염, 가지꼭두서니, 개망초, 개별꽃, 검정말, 갯패랭이, 금낭화, 금불초, 기린초, 꼬리조팝나무, 꽃마리, 꽃무릇, 나도개감채, 꽃방망이, 꽃기린, 꽃다지, 꼬리풀, 꿩의바람꽃, 노랑어리연, 노랑물봉선, 노인장대, 노린재나무, 노루오줌, 둥근잎꿩의비름, 들바람꽃, 둥굴레, 돌쩌귀, 동의나물, 딱취, 만주바람꽃, 딱지꽃, 모데미풀, 모래지치, 메꽃, 며느리밥풀꽃, 며느리밑씻개, 며느리배꼽, 바위솔….

들꽃 이름을 음미해 보면 깜찍하고 재미있다. 어김에는 우리말의 아름다움이 잘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색깔, 모양새, 특징 등을 발음에 그대로 살렸다. 들꽃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하나 같이 독특한 생김새를 가지고 있다.

“앙증맞고 깜찍한 꽃다지, 샛노란 점박이 얼굴로 땅바닥에 착 달라붙은 쇠비름, 돌돌 말린 꽃대가 사르르 풀어지면서 방글대는 하얀꽃마리, 오동통한 잎 사이로 노랑별을 뿌려놓은 돌나물, 꽃잎이 노란 바람개비처럼 빙글대는 물레나물, 하늘 향해 좁쌀을 내뿜는 냉이, 대롱 끝에 하얀 별사탕을 피운 쇠별꽃, 올망졸망 방싯대는 금싸라기 은싸라기 웃음을 바라보면 절로 마음이 애틋해진다.”(김이랑 수필 ‘함백산의 봄’ 중)

제비꽃은 제비가 날아올 때 피는 꽃이다. 오랑캐꽃이라는 이름도 가지고 있는데, 봄 춘궁기가 되면 북쪽 오랑캐가 내려와 백성을 괴롭혔다.

그래서 제비꽃이 피면 오랑캐가 내려오고 제비꽃 뒷모양이 머리 테를 드리운 오랑캐 뒷머리와 같다고 해서 붙은 이름이라고 전한다. 숱한 외침을 받은 수난의 역사가 꽃말에 들어있는 것이다.

옛날옛날 강원도 산골짜기 암자, 스님이 부모를 잃은 아이를 데려와 함께 살았다. 어느 날 겨울나기를 미처 못한 스님이 먹을 것을 구하러 어린 동자승을 암자에 홀로 남겨두고 마을로 내려갔다. 그런데 눈이 많이 내려 암자로 돌아가지 못했다. 이런 사정을 모른 동자는 추위와 배고픔을 참으며 스님이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동자는 끝내 앉은 채 굶어 얼어 죽고 말았다.

쌓였던 눈이 녹기 시작하자 스님은 서둘러 암자로 갔지만, 동자는 죽은 채로 마당 끝에 우두커니 앉아있었다. 스님은 동자승을 바로 그 자리에 곱게 묻어 주었는데, 이듬해 여름, 무덤가에 이름 모를 풀들이 자라났다. 한여름이 되니 마을로 가는 길을 향해 동자의 얼굴처럼 붉은 꽃이 피어났다. 이때부터 사람들은 이 꽃을 ‘동자꽃’이라고 불렀다.

옛날옛날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밭을 매던 중, 시어머니가 볼일을 보러 풀숲으로 들어갔다. 볼일을 다 본 시어머니는 늘 그랬듯이 옆에 잡히는 호박잎을 손에 잡고 뒤처리를 했다. 그런데 시어머니의 손에는 호박잎이 아니라 며느리 밑씻개가 잡혔다. 가시 돋친 잎으로 뒤처리를 했으니 얼마나 따가웠을까. 시어머니는 “몹쓸 놈의 풀, 꼴 보기 싫은 며느리년 볼일 볼 때나 손에 잡힐 것이지”라고 원망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전한다.

들꽃이 보고 싶은 날, 들로 나가 들꽃 앞에 쪼그리고 앉아 나직이 물어본다. 너는 왜 피느냐고, 그러면 꽃은 그냥 웃기만 한다. 되물으면 그냥 바람에 흔들리기만 한다. 가만히 가만히 생각해보면 들꽃은 그냥 피지 않는다. 산에 피든 들에 피든 음지에서 피든 마음속에서 피든, 꽃은 다 피어야 하는 까닭이 있다.

“별똥별 떨어진 자리에는 노란 민들레가 핀다. 노루가 오줌을 눈 자리에는 노루오줌꽃이 피고 제비가 똥을 눈 자리에는 제비꽃이 핀다. 장끼와 까투리가 사랑을 나눈 자리에는 꿩의바람꽃이 핀다. 사무친 그리움이 진 자리에는 상사화가 벙글고 애달픈 사연이 깃든 자리에는 찔레꽃이 핀다. 서러움 북받치는 자리에는 눈물꽃이 터지고 기쁨 넘치는 자리에는 웃음꽃이 핀다.”(김이랑 수필 ‘함백산의 봄’ 중)

할머니 무덤에는 할미꽃이 핀다. 구절양장 한숨 쉬며 넘는 고갯마루에는 구절초가 핀다. 신선이 노닐다 떠난 자리에는 배롱나무꽃이 피고, 범이 낮잠 잔 자리에는 꽃범의꼬리가 핀다. 아버지가 지게를 지고 노루목 넘을 때 아버지의 등에는 소금꽃이 핀다.

이 땅에 사는 민초는 마음을 들꽃에 담았다. 그리하여 들꽃이 피는 자리에는 사람의 마음이 피고 마음이 피는 자리에는 들꽃이 핀다.

/수필가·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