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 한 봉

이 칠흑의 밤

빛나는 것이 별뿐이랴

폭풍우 휩쓸고 간 과수밭

한 치 앞도 보이지 않는

우리 걸어가야 할 이 땅이 서러워서

살아남은 열매들은

더 시퍼렇게 눈뜨는 것이다

나무는 우지끈 언덕은 큰물 져서

엉망진창 막막 가슴

콸콸콸 흙탕물 계류로 흘러서

어쩔 것이냐 또 어쩔 것이냐고

울컥울컥 치밀던 설움마저 거덜나

차마 잠 못 들어 서성대는

이 폐허 나무 아래

풀여치도 예전 마음 넘쳐서는

쯧쯧쯔쯔 밤새도록 자지러지는 것이다

비바람 쥐고 나서야 더 굵어진다고

시퍼렇게 눈뜨는

저 순명의 기운이

차랑차랑 뿜어 내는 여명 속으로

숩자지처럼 얇은 하늘

사방 정정(淨淨) 열리고 있었다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지나간 후 엉망진창이 된 과수원의 모습을 세밀한 필치로 묘사하고 있다. 잔혹하다고 할만큼 쑥대밭을 만들고 지나간 폭풍우 속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는 망연자실한 심정이 펼쳐져 있다. 이러한 자연의 폭력에 순응할 수밖에 없는 것이 또한 자연이며 그런 폐허 속에서 다시 일어서서 스스로 복원되어가는 것 또한 자연의 힘인 것이다. 시인의 이런 자연의 운행원리를 순명(順命)이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