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주 영광중학교 교정에 보라색 꽃등이 걸렸다.

“쌤, 우리 아파트에 라일락이 피었어요. 놀러 오세요~.” 동료로 만나 친구로 지내는 E선생님이 보낸 사진과 인사말이었다. 사진을 클릭해서 보니 라일락이 아니라 등꽃이었다. 내가 보기에 등나무꽃처럼 보인다 하니 몇 년을 잘못 알고 있었다며 웃었다. 보랏빛처럼 맑은 사람이다.

‘흰눈’이라는 시가 있다. 공광규 시인이 봄꽃을 노래한 것을 그림책 작가 주리가 콜라보로 만나 시를 그림으로 피어나게 했다. 겨울에 내리다 못 다 내린 눈이 매화나무 가지에 앉고, 그래도 못 다 내린 눈이 벚나무, 이팝나무, 아까시, 산딸나무, 쥐똥나무 울타리와 찔레꽃 위에 앉다가 앉다가 더 앉을 곳이 없을 때 할머니 머리에 가만가만 앉는다는 옛날이야기 같은 시이다.

봄이 오면 출발선의 첫 테이프를 하얀 꽃들이 끊는다. 그러다 노랑 개나리가 언듯 고개를 내밀다 5월이 오면 분홍색의 물결이 뜰과 산을 덮는다. 아버님 뜰에는 내가 시집오기 전에 옆집에서 한 뿌리 얻어다 심은 산작약이 뭉싯거리고, 담장마다 얼굴을 내민 미스킴라일락의 볼이 발그레하다.

요며칠 등꽃이 피는 계절이라 집 근처 초등학교 마당을 찾아다녔다. 운동장 둘레 콘크리트 벤치에 꽃그늘을 드리우는 나무는 대개 등나무이다. 수도산 밑에 자리한 포항초등학교의 등꽃은 막 피기 시작했던 날인지 향기가 수도산 등산로까지 따라오더니, 항구초등학교의 넝쿨은 만개해서인지 그 아래에 서 있어도 그닥 많은 향이 나지 않았다. 대신 풍성한 송이들이 바닷바람에 종소리를 보라보라하게 들려 주었다.

영주로 출장 가는 길, 영덕에서 시작되는 고속도로는 우리나라 고속도로가 으레 그렇듯이 산을 깎아 길을 낸 도로다. 그 길을 따라 온통 연보라 꽃등이 내걸렸다. 창문을 열지 않아도 등꽃향이 밀려오는 기분이다. 연보라 꽃등 행렬은 영주에 내려설 때까지 이어진다. 저 많은 등나무를 일부러 심었을라나, 산속에 자생하는 것일까? 고속도로가 깊은 산과 산을 뚫고 다리를 놓아 지나가게 해놓았으니 길이 생기기 전부터 토박이로 살던 등나무였을 것이다. 등나무는 아파트 벤치 위에나 학교 교정에만 있는 뜰 안에 꽃인 줄 알았는데, 딱 등꽃의 계절에 이 길을 지나니 등나무의 고향이 산이었단 걸 깨닫는다.

영광여중에서 오전 수업을 마치고 점심시간을 이용해 동네를 산책했다. 오래전 영주역이 있던 자리여서인지 골목길 담벼락에 기차 그림과 80년 역사가 그대로 덧입혀진 관사가 아직 기적 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조금 더 걸으니 영광중학교 운동장에 점심 먹은 배를 꺼치는 소년들의 소란함이 가득했다. 교훈이 크게 보여 읽으며 지나다 보니 운동장 한구석에 보라빛 그늘이 한들거렸다. 등나무 벤치였다. 멋진 그늘을 만들어 아이들에게 달콤한 향기로 손을 흔들어도, 자신들이 더 빛나는 꽃이라는 듯한 녀석도 등꽃에게 눈길을 주지 않았다. 지나가는 과객인 나라도 얼른 사진을 찍어주어 등나무의 절정을 기록했다.

문헌의 기록을 보니 등나무의 나이가 상당하다. 영조 41년(1764년)에 신하들이 걷기가 불편한 임금을 위하여 만년 등이라는 등나무 지팡이를 만들어 바쳤다고 한다. ‘고려도경’에는 종이가 모두 닥나무로 만드는 것이 아니고 등나무 섬유를 써도 된다고 나와 있어 옛날부터 생활용품으로 많이 쓰였다.

경주 현곡면 오류리에는 용등이라는 신기하게 생긴 늙은 등나무 두 그루가 애달픈 전설을 간직하고 있다. 신라 때 이 마을에 두 자매가 사모한 청년이 전쟁터에 나가 전사했다는 소문에 얼싸안고 연못에 빠져 죽어 그 넋이 한 나무처럼 서로 엉켜 자라 등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그 뒤에 청년은 죽지 않고 돌아와 자매의 사연을 듣고 역시 연못에 몸을 던져서 팽나무로 환생해 서로 얼싸안은 듯 휘감고 수백 년을 자라왔다고 한다.

사연을 가득 담은 등나무는 이산 저산을 자유롭게 넘나든다. 궁궐 안까지 자취를 남겼다며 포항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여전히 연보라색으로 환하게 웃는다. 분홍분홍하던 봄이 보랏빛으로 깊어간다. /김순희(수필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