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는 1987년 겨울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때 ‘6월 민주항쟁’의 강렬한 영향 속에서 한국 사회의 향방에 비상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대학교 4학년으로 학과 대표로 학생들과 함께 시청 앞 신세계 백화점 앞에서 근 이십 일 시위 끝에 ‘6·29 선언’이라는 것을 경험했다.

12월까지 정세는 숨가쁘게 흘러갔다. 학생들은 그때 ‘직선제 개헌 쟁취’와 ‘제헌의회 수립’으로 나뉘어 있었다. 그리고 이는 당시 정세를 준비기로 보느냐 혁명기로 보느냐 하는 서로 다른 판단에 연결되어 있었다. NL파는 당시를 준비기로 보았지만 ND파들이 본 것처럼 당시는 분명 혁명적 시기였다. 그러나, ‘6·29 선언’은 김대중, 김영삼 두 지도자를 중심으로 한 야당과 다수파 민주화 운동 학생들의 요구를 수용하는 형태를 취했고, 때문에 ‘혁명적’ 정세에는 찬물을 끼얹어진 형국이 되었다.

이럴 수도 있구나, 했다. 군사통치가 직선제 개헌을 통해서도 연장될 수 있다는 위기감이 들었다. ‘두 김’이 단일화해야 한다는 아우성 소리가 높아져 가는 가운데 ‘김대중 씨’가 출마한다고 했다. 민주화 운동 학생들이 ‘김영삼 씨’를 지지하는 ‘후보 단일화론’과 ‘김대중 씨’를 지지하는 ‘비판적 지지론’으로 양분되는 가운데, 백기완 선생이 민중 후보로 일단 출마했다.

그날 대학로 앞에는 학생들, 시민들이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백기완 선생이 유세 연설에 나서 야권, 민주화 운동권의 단합을 촉구하며, ‘두 김씨’가 어떻게든 합의를 해야 한다고 했다. 백기완 선생을 실물로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고 생각된다.

참 강단있게 생기셨다. 거기에 순우리말로 기지와 유머를 발휘하여 사태의 정곡을 찌르고 풍자하며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여 나아갈 방향을 제시하는 능력이 너무나 뛰어나셨다. 백기완 선생의 대학로 ‘요구’는, 그러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그분의 ‘충정’도 경우에 따라서는 김영삼 지지의 다른 형태로 인식될 수도 있는 상황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두 김씨’가 전혀 양보할 뜻이 없었고, 각기 제 갈 길을 꿈꾸고 있었다. 설상가상으로, ‘칼 858기 폭파 사건’이라는 불가사의한 참극이 벌어지며, 그해 선거는 마침내 노 후보의 승리로 귀착되고 말았다. 당시 서울대생 양원태 군이 구로구청에서 부정선거에 항의, 점거농성을 하다 큰 일을 당하기까지 했다.

그때는 백기완 같은 분들은 그냥 민주화 운동 재야 인사로만 불렸고, 나 또한 그렇게만 인식했다. 세월이 흐르니 알겠다. 진정한 사람들은 어느 패에 휘말리지 않는 굳센 정신의 소유자라는 것. 백기완 선생이 바로 그런 분이셨다.

/방민호<서울대 국문과 교수> /삽화 = 이철진<한국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