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생들이 그린 조각보 디자인.

내 행복의 중심엔 가족이 있다. 몇 해 전 남편과 해인사에 갔을 때였다. 가을이 왔다고 절 주변 담장 밑에는 애기단풍을 중심으로 많은 꽃이 피어 도란거리고 있었다. 꽃향기를 느끼며 이곳저곳을 구경하다가 기념품 가게에 들렀다. 그곳의 많은 것 중에 내 눈에 뜨인 것은 엽서 꾸러미였다. 갖가지 꽃과 곤충, 풍경을 담은 엽서들도 있었지만 내가 고른 것은 전통 보자기 그림이었다. 엽서 속의 그림을 보니 몬드리안이나 칸딘스키가 떠올랐다. 그들이 혹시 우리나라 조각보의 문양들을 커닝한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조각보는 쓰다 남은 천 조각을 이어서 만든 것이다. 자투리 천을 활용하는 생활 지혜의 소산이므로 주로 일반 서민층에서 널리 쓰였다. 정성을 많이 들여야 하는 조각보는 공을 들인 만큼 복을 불러들이고, 조각을 많이 이을수록 명이 길어진다고 하여 장수를 기원하는 의미도 있다고 한다. 보자기는 물건을 싸서 보관하거나 운반하는데 간편하게 쓰인다. 또한, 예절과 격식을 갖추는 의례용으로도 사용된다.

보자기에 무언가를 싼다는 것은 복을 싸는 것에 비유하기도 하였다. 그래서 복(福)이라고도 하고, 보(褓), 보자(褓子), 또는 지방에 따라 보재기, 포대기, 밥수건, 밥뿌재라고도 부른다. 보재기, 밥뿌재…, 참 정겹다.

서로 다른 자투리들을 이어서 쓸모 있는 보자기를 만든다. 우리의 삶도 그런 것이 아닐까. 일상의 작은 조각들이 나를 중심으로 모여 기쁘게 하고 슬프게도 한다. 엽서의 조각보 속에 내 삶이 보였다.

오늘도 남편은 자정을 넘겨 집에 돌아왔다. 요즘 따라 술자리가 잦다. 제발 좀 쉬엄쉬엄 마시라고 했더니, 안 취했다며 시치미를 뗀다. 한술 더 떠 몸에 좋지 않은 술이라 빨리 마셔서 없애버려야 한다고 중얼거린다. 그러고는 뭐라고 대꾸할 사이도 없이 잠들어 버린다. 취하기만 하면 잠드는 것이 그의 술버릇이다. 집에 손님이 와 있어도 소파에 살짝 기대어 코를 골며 잠을 청한다. 시아버님 말씀이 재미있다. “야야, 얼매나 순하노. 잘 먹재 잘 자재. 키우기 그저 그만 아이가.”그 말에 나는 그만 웃을 수밖에 없다. 그 웃음 끝에 내 행복의 조각보는 또 한 뼘 넓어진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나는 목욕 갈 때 친정엄마와 함께 간다. 엄마와 함께 가면 친정에서 일어나는 이런저런 이야기를 들을 수 있다. 큰동생이 근무하는 회사에서 진급한 이야기, 작은동생이 새로 안마의자를 사준 것, 이모들의 소소한 다툼까지…. 그런 이야기를 하면서 엄마는 내 등을 밀어주신다. 꼼꼼하게 내 몸 구석구석 씻어주면서 살이 쪘으니 다이어트 하라고 하신다. 그 말이 잔소리 같기도 하지만 거슬리지는 않는다. 엄마와 함께 몸을 씻으면서 마음도 편히 쉬고 온다. 이 또한 내겐 행복이다,

내 삶의 조각보에 또 다른 고운 무늬를 더해주는 사람은 친구이다. 늦은 오후에 전화벨이 울린다. 친구가 저녁을 같이 먹자고 한다. 비도 오고, 외출하고 돌아와서 저녁밥 하기 싫은 걸 어찌 용케도 알았을까. 생각만 해도 마음이 푸근해지는 그 이름 친구! 친구는 또 다른 이름의 가족이다.

지인이 유기묘를 데려와 새끼를 다섯 마리 낳았다기에 한 마리 데려와 키우기, 은규샘과 수목원 산책하기, 남편과 가까운 곳에 답사하기, 퀴즈프로 보면서 문제 맞히기, 두 문제 맞히고 옆에 앉은 아들에게 뻐기기…. 한 조각 한 조각 수명과 복을 기워 가는 조각보처럼 내 행복도 작은 기쁨과 사연들로 채워 가야겠다. 조각보는 쓰다 남은 천 조각으로 만들지만 내 행복의 조각보를 이어주는 것들은 소중한 삶 그 자체이다.

돌아가신 어머님이 재봉틀로 박아 만든 밥뿌재가 하나 있다. 가족 누군가의 옷 자투리에서 나온 것들로 기운 것이다. 오래 사용하셔서 색이 바래 처음의 색깔을 다 잃었다. 어머님의 세월이 깃들어 있는 것 같아서 더 좋다. 나도 어머니의 삶의 한 조각을 채운 맏며느리이니 이 조각보는 내가 간직해도 될 것이다. 고이 접어 서랍장에 넣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