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개가 아름다운, 반닫이를 닮은 재봉틀.
자개가 아름다운, 반닫이를 닮은 재봉틀.

친구네 집은 보물섬이다. 방문을 열 때마다 내가 처음 보는 물건들로 가득 차 있다. 어머니가 시집올 때 가져온 자개농은 언뜻 보면 무늬가 단순해 만들기 쉬워 보이나 나무에 그냥 자개를 붙여 볼록하게 완성하는 것과 다르게 나무에 미리 여러 모양으로 파내고 자개를 박아서 만든 수공이 많이 든 명품이다. 부엌 찬장에 12인조 양식기도 볼만했다. 그릇 모양도 특이하지만 12명의 재떨이까지 갖추어져 구성 자체가 처음 보는 것이었다. 하나씩 꺼내서 보는 재미가 쏠쏠했다.

30년 지기 친구 친정에 오랜만에 놀러 갔다. 외벽에 조그만 타일을 붙인 그 시절엔 잘 지었다고 소문이 났을 법한 이 층 양옥집이다. 거실에는 윗 층으로 이어진 계단이 있어서, 홈드레스를 입은 드라마의 여주인공이 우아하게 걸어 내려올 것만 같은 전형적인 부잣집이었다.

방에는 내가 제일 궁금해한 물건이 놓였다. 창고 깊숙이 있던 것을 딸 친구가 보고 싶다는 말에 꺼내서 말끔하게 닦아 놓으셨다. 혜경이 아버지 딸 사랑은 예전부터 유별났다. 30년 전에도 같이 근무하던 유치원 앞까지 매일 태워다 주고 퇴근 시간에 맞춰 또 데리러 오셨다. 아버지와 데면데면한 나로서는 그런 모습이 무척 부러웠다. 딸의 말이라면 어디선가 달려오는 우주 소년 짱가처럼 든든한 아버지였다. 아니 아빠였다. 혜경인 그때도 지금도 아빠라 부른다.

2층방 층고(層高)가 이렇게 낮았던가. 오래된 형광등이 한쪽 눈을 껌뻑거리자 ‘아빠~’ 하는 외마디에 금방 손봐주셨다. 다시 아무 일 없다는 듯 시침을 떼는 형광등. 그 불빛 아래 장 하나가 놓였다. 빠알간 색깔의 자태가 곱다 못해 눈을 뗄 수 없을 정도다. 반닫이 같기도 한데 두 짝의 문을 열면 변신로봇처럼 다른 모습이 된다. 재봉틀이었다. 발판을 밟아 재봉질을 하니 손으로 돌리는 앉은뱅이 보다 편한 물건이었다고 자랑을 하셨다.

오른쪽 문짝을 여니 서랍이 네 개가 있다. 조그만 서랍 안에 까마득한 이 집의 옛날이야기가 가득했다. 첫 번째 서랍엔 재봉틀에 쓰이는 북과 실, 누군가의 옷을 만들다 남은 천 조각과 크기가 다른 단추들이 가득했다. 두 번째 서랍을 여니 재봉틀의 출생 증명서가 나왔다. ‘드레스 스윙 머신’ 이라고 영어로 써진 이름과 한자로 동양 미싱 주식회사에서 만들었다고 직인이 찍혔다. 뒷면에는 품질보증서 같기도 한 말들이 영어로 적혔다. 그 밑에 또 하나의 설명서가 있었다. KS 인증마크가 붙은 ‘하이콜드냉장고’에 관한 것이었다.

김순희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다음 서랍엔 올림푸스 카메라 뚜껑이, 뽀빠이가 그려진 동그란 딱지 하나가 나왔다. 별이 일곱 개 있고 923765 숫자까지, 그때는 그 하나하나가 친구 딱지를 이기기 위해 다 쓸모가 있던 것들이었다. 아마 혜경이 동생의 소중한 기억이 담겨있을 추억의 기록이다.

빨간 몸체에 하얀 자개를 박아 넣은 재봉틀이다. 누구네 집에서도 못 본 때깔이라 탐나는 물건이었다. 하도 이뻐서 눈을 못 떼는 나와 다르게 혜경인 관심도 없어 보였다. 집안 가득 오래된 물건이 가득해서 늘 보던 거라 그런 듯하다. 저 재봉틀로 포대기를 만들어 친구를 업었다며 그 시절 이야기를 한없이 들려주시는 어머니와 딸 친구가 궁금해하는 구석구석 열어 보여주시는 아버님의 그 손길이 따뜻해서 참 좋았다.

한참을 집구경을 끝내고 나오자 늦자두 한 봉지를 건네신다. 추희였다. 몇 해 전 혜경이가 자두 하나를 맛나게 먹는 모습을 보고 앞뜰에 심은 자두나무가 올해 첫 열매를 거두었다고 담아 주셨다. 따님 주시지했더니, 옆에선 혜경이는 그날 내가 배가 고팠었는지 우연히 맛있게 먹었을 뿐 신맛이 나서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딸의 스쳐 지나는 모습도 놓치지 않고 나무를 키워 열매를 먹이려는 부모님의 사랑이 붉게 익어서 나에게까지 당도했다.

오래된 물건들도 새것처럼 닦으며 사는 친구네 부모님이 저 이층집에 오래 머물길 기도했다. 주신 자두를 한 입 깨무니 달콤한 향이 입속 가득 퍼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