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미곶 항구.
호미곶 항구.

대구에서 나고 자란 내가 결혼을 하며 남편 직장을 따라 포항에 온 것은 26살 초겨울이었다. 집, 직장이 전부였던 내가 타 지역에서 결혼생활을 시작한다는 건 두렵고 설레는 모험이었다. 게다가 신혼집에서 몇 분만 걸어가면 대구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넓은 바다가 그림처럼 펼쳐져 있어서 너무나 신기하고 신나는 일이었다. 그러나 동화처럼 설레는 신혼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즈음 나는 향수병을 앓았던 것 같다. 호미곶에 큰시누가 살고 있었으나 나이 많은 손위시누가 갓 결혼한 새댁에게 마냥 기댈 수 있는 의지처가 될 순 없었다. 딸아이 둘을 낳고 남편과 함께 운영하던 작은 보습학원이 자금난에 허덕일 때 함께 살던 시어머니까지 병세가 악화되어 요양원으로 모시게 되었다. 살아보려 발버둥을 쳐도 도저히 나아지지 않는 형편에 남편은 삶의 의지마저 꺽인 채 몇 달 동안 방에서 나오지를 않았다. 상실감과 배신감에 포항을 떠나기로 마음먹었다. 내가 나고 자란 대구로 가자.

그즈음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언니가 도통 연락이 닿지않자 집으로 찾아왔다. 몰라볼 정도로 살이 빠진 데다 얼굴색마저 형편없으니 여간 놀란 기색이 아니었다. 자초지종을 듣던 언니는 함께 눈물범벅이 되어 울어주었고, 자기도 넉넉지 못한 형편에 지갑에 있던 7만원을 털어 내 손에 쥐어 주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언니의 뒷모습을 보며 하염없이 울었지만, 그 잠깐 동안 나는 어떤 실낱같은 희망을 보았는지 그동안의 응어리가 씻은 듯 사라지는 걸 느꼈다.

이제는 남편도 직장을 얻어 안정을 찾아가고, 포항을 떠나려했던 내 마음도 언제 그랬냐는 듯 생소하기만 하다. 이젠 누구에게나 ‘나는 포항 아지매’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포항이 싫다고 떠나려했던 대구 아가씨를 말없이 품어 준 그 언니처럼 포항이 이제는 나의 새로운 고향이 되었다.

/유향미(포항시 북구 장흥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