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톨릭교회 9월 순교자성월
항상 화평하고 효성 지극했던
103위 순교성인 이윤일 요한

성 이윤일 요한 초상화.
성 이윤일 요한 초상화.

가톨릭교회에서는 9월을 ‘순교자 성월’로 보낸다. 신앙을 증거하기 위해 생명까지 바친 선조들의 행적을 기리며 공경하고 하느님의 구원 은총에 감사하는 시기다. 순교자성월을 맞아 천주교 대구대교구 제2주보인 이윤일 요한 성인에 대해 알아본다. 이윤일 요한 성인의 삶을 통해 순교의 의미를 되새기고 앞선 시대를 살아간 신앙 선조들을 묵상해보는 건 어떨까. 

 

△순교자란 누구인가

‘순교(殉敎)’는 종교를 위한 죽음을 의미한다. ‘순교자(殉敎者)’는 종교를 위해 죽은 이다. 신앙선조들은 ‘목숨을 바침에 이른다’는 의미를 지닌 ‘치명(致命)’, ‘치명자(致命者)’라는 말로 순교를 표현했다.

라틴어로 순교는 본래 ‘증언’ 혹은 ‘증거’ 의미의 그리스어에서 온 말이다. 이 말이 성경에서는 사도행전에서 “주님의 증인인 스테파노”(사도 20, 22)라고 처음으로 등장하고, 요한묵시록에서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님의 증인들의 피”(묵시 17, 6)라고 사용되는 등 ‘피를 흘리는 증거’로써 사용됐다. 이후 교부들은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피 흘려 죽었음을 나타내는 말로 이 말을 사용해왔다.

모든 죽음이 순교인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순교자의 조건을 3가지로 드는데, 첫째는 실제로 죽임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진리를 증오하는 자에게 죽음을 당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그리스도와 그의 진리를 지키고자 기꺼이 스스로 받아들인 죽음이어야 한다. 신앙과 진리를 위해서라는 이유가 있더라도 자살이나 선택하지 않은 죽음은 엄밀히 따지면 순교라고 보기 어렵다는 것이다.

가톨릭교회에서 말하는 순교자는 순교자 측과 박해자 측의 ‘질료적, 형상적’ 순교 사실이 모두 증명된 이들을 지칭한다. 이 중에는 신원이 밝혀지지 않은 수많은 무명순교자도 큰 부분을 차지한다.

△성 이윤일 요한 성인

우리나라 성인 103위 가운데 첫 번째에 이름을 올린 평신도가 정하상 바오로라면, 마지막에 이름을 올린 평신도는 이윤일 요한이다.

이윤일 성인은 1812년 충청도 홍주 출신의 구교우 집안에서 태어났다. 하지만 충청도를 떠나 경상도 상주 갈골로 이주했으며, 아버지가 사망한 후에는 다시 문경의 여우목(호항리)으로 이주했다고 한다. 당시 그곳은 성인의 처갓집 식구들(순교자 박사의 후손)이 많이 살던 곳이었다. 그곳에서 그는 농업에 종사하면서 결혼해 슬하에 자녀들을 낳아 기르고 있었다.

103위 성인 가운데 많은 이들이 ‘회장’의 직분을 다했던 것처럼, 이윤일 요한 또한 공소회장으로 활동하며 이곳에서 외교인 30호를 입교시켰다. 그는 본래 성품이 순량해 남을 꾸짖거나 탓하는 일이 없었고, 기쁠 때나 슬플 때나 항상 화평한 모습을 보였다고도 전해진다. 또 아버지에게 효성도 지극해 동네 외인들이 그를 위해 효자문을 세워야 마땅하다고 말할 정도였다.

1866년 병인박해가 터지고 그 여파가 경상도에까지 이르러 이윤일 성인은 그해 11월 문경 여우목에서 가족을 포함한 마을교우 30여 명과 함께 포졸들에게 체포됐다. 그는 우선 문경관아로 끌려갔는데, 3일 동안 혹형과 고문을 당한 후 상주로 이송됐다. 상주에서는 한 달에 세 번씩 3개월 동안 혹형과 고문을 받았다고 전해지며, 다시 대구감영으로 이송돼 사형선고를 받았다.

이윤일 성인은 사형선고를 받고도 본래의 여유와 기쁨을 잃지 않으며 끊임없이 기도하는 모습을 보여 다른 이들에게 모범이 됐다. 1867년 1월 21일, 대구 남문 밖 관덕정에서 52세의 나이로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다.

그의 시신은 후손에 의해 처음 대구 비산동 날뫼 뒷산으로 이장됐다가 경기도 용인군 묵리, 미리내성지 무명순교자 묘역을 거쳐 1987년 대구 성모당에 안치됐다. 이후 성인은 대구대교구 제2 주보성인이 됐으며, 1991년 관덕정순교기념관 성당 제대에 봉안됐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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