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안동 사빈서원과 임천서원

뒤에서 본 사빈서원.
뒤에서 본 사빈서원.

이 땅에 유학이 들어온 삼국시대부터 훌륭한 유학자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유교적 이상사회를 꿈꾸는 청정한 마음으로 향촌사회를 교화하고 학문을 닦을 때까지는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러나 세월이 지날수록 타락의 구렁으로 빠진다. 급기야 향촌과 관위에 군림하면서 온갖 피해를 주어 국가의 기틀까지 흔드는 지경에 이른다.

#. 서원의 발생과 비약적인 발전

삼국시대부터 도입된 유학은 시험(과거)으로 관리를 선발하기에는 공평하면서 효율적이었다. 고구려 말기에 도교가 수용되어 세력을 떨쳤지만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는 불교가 국교였다. 조선은 고려 말에 타락한 불교를 대신하여 유교가 국교가 된다. 고려의 충신들은 벼슬에 나가지 않다가 어느 정도 안정기에 접어든 세종을 거쳐 성종 때부터 유학으로 다져진 신진사대부(사림세력)들이 관리로 등용되어 신선한 바람을 일으킨다. 그러나 잠시 꽃을 피우다가 연산군 때 사화(사림의 화·무오, 갑자, 기묘, 을사)로 인한 피의 숙청을 당한 사림세력들은 낙향하여 향촌의 자녀들을 가르친다. 서원은 정치적인 의심도 받지 않고 꾸준히 학문을 연마해 나갔다. 또 관학(공립)인 향교가 공부는 하지 않고 술판 벌이는 타락의 수렁에 허우적거려 사립 학교격인 서원이 신선한 충격이었다. 향교가 도심에서 반경 5리(2km) 안에 두었다면 서원은 도심의 소음을 떠난 자연 속이 입지적인 조건이었다.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소수서원)도 숙수사 절터에다 지었듯이 이제 불교(절)에서 유학(서원)으로 공간의 이동이 되었다.

서원은 중국의 당나라부터 시작하여 우리의 고려시대도 있었다. 그러나 선비들이 학문을 강론하고 석학이나 충절로 죽은 사람을 제사지내는 즉 강학(유학)공간과 선현봉사 두 기능이 합쳐질 때 서원이라 하고 유학의 엘리트 전사를 키우는 곳이다.

 

임천서원 옆면.
임천서원 옆면.

공자의 가르침(사상)이 유학이라면 성리학은 성명의리지학(性命義理之學)의 준말로 인간과 우주에 대한 철학이다. 공자의 유학에다 재해석한 것이 성리학이고 주자학도 성리학의 일부인데 송나라 주희가 사고체계를 세웠다 하여 주자학이라 한다. 성리학은 주희의 주자학, 정호, 정이의 정주학, 왕양명의 양명학, 육구연의 심학, 신유학, 도학, 이학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불리었으나 우리나라에서는 주자학, 정주학만 주류를 이루어 진보적인 양명학이나 나머지는 이단으로 배척하여 다양성이 결핍되어 학문이 경직되었다.

고려 말 순흥(영주) 출신 안향이 성리학(주자학)을 처음 도입한다. 1543년(중종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이 안향을 배향하기 위해 백운동사원이 처음 세워진다. 그러나 이때는 선현봉사의 사묘(祀廟) 기능이었던 것을 풍기군수로 부임한 퇴계 이황이 정착, 보급하는 일등공신이다. 충신이나 명현을 제사하고 인재를 키우기 위해 세운 사설기관인 서원을 공인화 하고 존재를 알리기 위해 백운동서원에 대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구하여 관철시킨다. 사액서원이 되면 권위는 물론이거니와 서원의 명칭을 부여한 현판과 서적, 노비 등을 내렸다. 퇴계의 고향 예안의 역동서원을 설립주도하고 10여 곳 서원에 대해서는 건립에 참여하거나 서원기(書院記)를 지어 보내는 등 보급에 주력하였다. 전국 도처에 서원이 세워지면서 명종연간에 18개소를 시작으로 사림세력이 주도권을 쥐게 된 선조 때 본격적으로 발전하여 60여개가 생기고 22개가 사액서원이 된다.

 

사빈서원 강당.
사빈서원 강당.

이처럼 붕당정치와 사림들의 서원보급운동으로 전국 도처에 세워지면서 숙종 때는 서원(167개 중 사액 105개)과 사우(174개 중 사액 200개)를 합친 사액서원이 305개였다. 시간이 지나면서 조상숭배가 극에 달해 별 내세울 학문적 업적, 행적이 없는 인물이라도 자손들과 제자들이 돈 있고 권력에 줄이 있으면 서원을 세웠다.

급기야 전국에 천(909개)여개가 생긴다. 이중 경상도가 유독 많이 생기는데 전국서원 417개 중 173개 사우 492개 중 151개 이중 200개가 사액 받았으니 서원천국이었다.

#. 공자가 살아 나와도 용서하지 않겠다

세상 모든 이치가 그러하듯 물도 고이면 썩는 것과 같이 서원의 남발은 국가에 심각한 위기를 초래했다. 서원폐단의 첫 상소는 1644년(인조 22년) 영남 감사 임담이었는데 숙종 초까지는 서원옹호론이 우세하여 오히려 167개소가 더 생긴다. 서원통제가 적극성을 띤 것은 1703년(숙종 29년)에 전라감사 민진원이 조정에 알리지 않고 서원을 세우는 경우 지방관을 논죄하는 상소를 왕(숙종)이 받아들여 강제성을 띈다. 1713년에는 예조판서 민진후의 요청으로 1714년 이후부터는 첩설(疊設)을 엄금하고 사액을 내리지 않을 것을 결정했다. 1717년 숙종이 1703년(숙종 29년) 8도의 관찰사에게 1703년 금령 후 창건한 서원을 조사하게 하여 1719년(숙종45년) 왕이 직접 하나하나 존폐를 결정하였고, 특히 경상도 서원에 훼철을 단행하다가 숙종이 죽어 중단되었다. 숙종과 장희빈의 아들 경종 때 대사성 이진유의 주장으로 1703년 이후의 첩설서원은 그 편액을 철거하였다. 그러나 새로 집권한 노론은 소론의 노론 서원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여 영조즉위 후 편액을 다시 걸었다. 이후 영조는 서원이 분쟁을 유발하고 정국을 혼란시키는 요인으로 판단하고 탕평의 일환으로 1714년 이후에 설립된 사원, 사우, 영당 등의 모든 제향기구 192개(서원 19개, 사우 173개)를 훼철시킨다. 정부지원이 끊기자 서원들은 악랄한 방법으로 재원을 마련한다. 전국의 서원들도 마찬가지였지만 특히 우암 송시열을 모신 청주의 화양서원과 김창집 등 노론 4대신을 모신 과천의 사충서원이었다. 서원에 제사 경비를 마음대로 정해놓고 세금 고시서보다 더 강력한 묵패를 관아나 부호들에게 보낸다. 묵패에 찍힌 대로 안내면 고을 원님은 언제 목이 날아갈지 모르고, 부호들에게는‘부모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았다.’ ‘자식을 잘 가르치지 않았다.’‘양반에게 대 들었다’식으로 잡아와서 서원에 무릎 꿇게 하여 사형(私刑을 가하고 관가(서원에 감옥이 없어)에 가두게 했다. 이 묵패는 전국 어디에나 통했다. 도깨비 방망이였고, 체포영장이었다.

 

임천서원 강당.
임천서원 강당.

화양서원에는 평소에도 수 백 명씩 왕래하고 제삿날에는 수만 명의 유생들이 몰려와 숙식을 화양서원아래 복주촌(福酒村)에서 한다. 이 복주촌은 겉으로는 상민이 운영하는 것 같지만 서원 직영이라 여기에 종사하는 상민들은 서원의 원노(院奴)에게 주어지는 군역, 부역을 면제받았다. 마침내 고종을 등극시킨 첫해(1864년) 대원군(1820~1898)은 극에 달한 서원의 횡포를 “사람이 옛 현인을 높이고 사모하여 서원과 향사를 세운 것은 본래 그 학문을 익히고 그 정신을 밝히려는 것이었도다. 조정에서도 이에 따라 액호를 내리고 토지와 일꾼을 준 것은 그 뜻이 훌륭했고 그 은혜 두터웠도다. 그런데 어찌하여 말류(末流)의 폐해가 이루 말할 수 없게 되었는가? 글 읽는 소리가 쥐죽은 듯 들리지 않고, 술이나 마시고 다투면서 이기려는 일이나 벌이며, 군역을 피하는 자들이 반이 넘게 정한 원노에 끼어들게 하고, 평민을 학대하는 자들이 공공연히 사람들을 잡아들이게 하면서 이익만을 찾아 나선다. 서로 본받아 사사로이 서원을 이곳저곳에 세워 곳곳에 서원이 바라보일 정도이며, 공갈 협박을 일삼고 다투기를 그치지 않는다. 서원, 향사를 세운 본뜻이 어찌 이러했겠는가? 옛날 현인이 이를 알았다면 반드시 즐거이 제사를 흠향하지 않고 수치로 여길 것이다.”

이런 분부를 내리는데 썩어빠진 유생들은 대원군의 서원정책에 반기를 들고 횡포를 일삼던 유생들이 반성은 커녕 기승을 부리자 전국에 횡포가 적은 47개만 남기고 화양서원, 사충서원 포함하여 모조리 헐어버렸다. 철원매주(撤院埋主) 즉 신주는 땅에 묻어버렸다.

급기야 전국의 유생 수 만 명이 경복궁 앞에서 상투적인 문투로 상소문을 들고 죽음도 불사하겠다고 버티자 대원군은 코웃음을 치면서 “공자가 살아 와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통쾌한 말을 남긴다. 대원군이 실각하자 전국 곳곳에 서원을 다시 세운다.

 

사빈서원 경원루.
사빈서원 경원루.

#. 사빈서원과 임천서원

안동 내앞(천전)마을에 들르고, 근처의 사빈서원으로 갔다. 기능 잃은 서원의 빈 건물만 나그네를 맞이하고 있었다. 의성김씨 중흥조 청계 김진과 그의 다섯 아들(약봉, 귀봉, 운암, 학봉, 남악)의 덕행을 추모하고 후학양성을 위하여 1710년(숙종36년) 후손들과 사림이 건립했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철거했다. 1882년(고종 19) 영남 사림의 공론에 따라 강당과 사우만 다시 세운다. 임하댐 수몰로 1987년 임하리로 옮겼다가 2011년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긴다. 혼자서 이리저리 둘러보고 임천서원으로 갔다.

임청각을 지나고, 안동여고, 안동MBC를 지나 안동 시외터미널에서 동쪽 호암마을 산중턱의 임천서원은 방치되어 귀신이 나올 것 같았다. 임천서원은 학봉 김성일의 도와 학행을 기리기 위해 1607년(선조 40) 임하현에 세웠다가 1618년(광해군 10)에 사액 받았다. 1847년(헌종 13) 서후면 엄곡촌으로 옮겼다.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훼철되었다가 1908년(순종 2)과 1809년에 지금의 자리로 옮겼고, 이 서원도 학봉종택 근처로 또 옮긴단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