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기숲 이팝나무 그늘 아래 서니 큰 키에 저절로 탄성이 나와 우러르게 된다.
장기숲 이팝나무 그늘 아래 서니 큰 키에 저절로 탄성이 나와 우러르게 된다.

이윽고 따스한 햇볕 사이로 한 줄기의 바람이 불어온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자 봄이 몸 안으로 퍼져간다. 소나무들도 새순을 내밀고, 온 마을에 노랑 이불을 덮으러 나서면 이팝나무도 고슬고슬한 밥을 지어 올린다. 이래서 봄은 ‘동사’이다.

봄이 한창인 장기숲으로 산책을 나갔다. 숲이라 부르기엔 어색한 공간이다. 학교 교문으로 들어서야 하니까 말이다. 지난해 이맘때 같으면 까까머리 중학생들이 두런거렸겠지만 올 해는 햇살만이 교정을 가득 채웠다. 운동장 한편에 200년의 세월 동안 품을 키워온 이팝나무가 있다. 꽃이 피기 전에는 이팝나무라고 선뜻 알아보기 힘들 정도다. 왜냐면 이렇게 큰 키를 보기가 흔치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초록이 무성한 오월, 흰 꽃을 피우는 것을 보면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아름다운 모습에 넋을 놓고 바라보게 된다. 그 밑으로 들어가니 그늘이 넓고 편안해 탄성이 절로 나온다.

이팝나무의 학명은 치오난투스 레투사(Chionanthus retusa)인데,‘하얀 눈꽃’이라는 의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꽃송이가 사발에 소복이 얹힌 흰 쌀밥처럼 보여 ‘이밥나무’라고 했으며, 이밥이 이팝으로 변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라북도 일부 지방에서는 늦봄에 핀다 해서 ‘입하(立夏)목’ 또는 ‘이암나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 해의 풍년을 점치는 나무로도 알려져 있는데, 꽃이 많이 피는 해는 풍년이, 그렇지 않은 해는 흉년이 든다고 믿어 왔다.

장기숲에는 활엽수가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심어져 있었다고 한다. 이팝나무, 느릅나무, 느티나무, 팽나무 등 큰키나무가 듬성듬성 서 있는 밑에 탱자나무, 신나무, 산사나무, 꾸지뽕나무 등 작은 키 나무들이 빽빽이 자라도록 했다. 그 밑을 흐르는 물에 발을 담그면 어찌나 시원한지 발이 시려 오래 담그지 못 했다고 한다. 이처럼 복층 형태로 숲을 가꿔 나무와 나무 사이를 지나다니기가 어려워 숲속에 들어가면 하늘이 안 보일 정도로 울창해 동네 사람들도 길을 잃곤 했다고 기록에 전한다.

김순희<br>​​​​​​​수필가
김순희
수필가

예부터 바다와 육지를 연결하는 교통의 요충지 역할을 해 온 장기는 신라 때부터 중요한 군사기지로 자리했다. 장기읍성에 올라서면 지금은 성 아래 논으로 된 장기들판이 보이지만 예전에는 나무들로 가득한 장기숲이 있었다. ‘경상도읍지’에 따르면 숲은 길이가 7리, 너비가 1리 였다고 하며 면적이 지금 단위로 19㏊였다고 하니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배에서 내린 왜구 무리들이 거대한 숲의 장벽 앞에서 멈칫한다. 그 순간 요란한 총포 소리와 함께 나무 틈에서 화살이 쏟아져 나온다. 당황한 일부 왜구들은 숲속에 뛰어들었지만 탱자나무 가시에 찔려 오도가도 못 하거나 길을 잃고 헤매다 붙잡힌다. 장기숲에서 벌어졌을 법한 상황이다.

하지만 장기숲은 광복 후 장기중학교 건립과 새마을운동으로 농사짓는 경작지로 개간되면서 숲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교정에 십여 그루의 거목들이 남아 여기가 숲이었던 시절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다. 당시 베어진 나무는 입찰을 통해 매각되었다고 하는데, 주로 숯장사들이 사들여 현장에서 바로 나무를 베어다 숯을 만들었다고 한다.

몇 해 전부터 장기면 주민들은 장기숲복원추진위원회를 출범시킨 뒤 장기숲의 옛 모습이 배경에 있는 ‘추억의 사진전’을 여는 등 숲 복원운동에 적극 나섰다. 숲을 가꾸어 간직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단순히 또 하나의 마을 숲을 되살린다는 범주가 아니라 지역 문화를 발굴하고 알려 가치를 높여야 다음 세대에도 유효한 자산으로 이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머리가 아프면 할 수 있는 일이란 산책밖에 없다고 했다. 나무 그늘에 들어가는 것이 쉴 휴(休)자이니 동·서양이 같은 방법으로 마음을 쉬었다. 뭉싯뭉싯 하얀 구름을 얹은 이팝나무를 바라본다. 왜 바라보기만 해도 기운이 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지 모르겠다. 200년 동안 지녀온 세월의 기운을 내게 주는 걸까. 코로나, 다 지나간다. 걱정 말아라. 장기숲이 나를 위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