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국탄댁과 오류헌, 치헌고택

국탄댁 고가.
국탄댁 고가.

임하댐으로 의성김씨 지례파 집성촌 지례마을이 수몰되면서 마을위의 산으로 옮겨지은 고택들이 ‘지례예술촌’이라면 나머지 고택들은 각자의 길을 가듯이 여기저기 흩어져 옮겨지어졌다. 그러나 머나먼 타향객지에 떠난 것이 아니라 수구초심(首丘初心), 즉 근본을 잃지 않고 죽어서라도 고향땅에 묻히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의성김씨가 임하에 뿌리내린 내 앞(천전)마을이나 옆 마을로 옮겼다. 국탄댁과 오류헌 고택은 근처 임하마을로, 치헌 고택은 내앞 마을로 옮겨지었다.

코로나19 때문에 전국이 우울한데 안동은 큰 산불까지 겹쳐서 가는 마음 찹찹하다.

 

소박하고 담박한 치헌고택.
소박하고 담박한 치헌고택.

#. 국탄댁과 이우당, 오류헌 고택

국탄댁은 1757년 국탄 김시정이 임동면 지례마을에 지었는데 임하댐 건설로 1988년에 이곳 임하마을로 옮겨지은 고택이다. 집의 구조는 보통의 안동 고택들과 같이 사랑채가 앞에서 안채를 감싸고 있는 ‘ㅁ’자 형태로 지은 집이다.

나지막한 동산을 끼고 잘 관리되어 예전부터 여기에 있었던 고택 같았고 집도 잘 가꾸어 놓아 눈 맛을 즐겁게 했지만, 굳게 닫힌 대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여기같이 국가의 세금으로 보존 유지해주는 문화재 고택들은 안채야 사생활로 보호해준다면 최소한 대문은 열어놓아야 된다.

저만큼 떨어져있는 오류헌 가는 길에 정자가 일품인 안동 권씨 부정공파 임하지파 이우당 권환의 종택에 갔다. 인조 18년(1640년)에 지은 연륜 쌓인 고택이라 눈 맛을 즐겁게 했다.

대문에 들어서자 높은 단을 쌓은 우람한 정자가 앞을 가로막았지만 정자 그 자체가 아름다워 수용할만했다. 평지의 집안에 이렇게 높게 단을 쌓은 정자는 보기 드문 현상인데 평지다보니 내려다 보기 위한 융통성이다. 담백하고 검소한 낭만이 흐르는 정자와는 사뭇 다르게 굵은 원기둥에 화려한 멋을 부려 사찰의 대웅전 같았지만, 온갖 멋을 부려도 아름다움이 풍겨 칭찬 할만하다. 마스크 낀 채로 일하고 있던 친절한 종부는 어디서 왔냐고 묻고는 남편을 불렀지만 사양하고 잠시 머물다 오류헌으로 갔다.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생가.
독립운동가 김동삼의 생가.

오류헌은 특히 대문으로 권위를 세우는 안동양반들 집 같아 향기로운 마음으로 들어가고 싶은 길손을 주눅 들게 한다. 대문은 열려있어 여봐라 외쳐 댈 필요도 없지만, 뛰쳐나올 돌쇠도 없는 시대다. 돌쇠는 사라졌는데 마나님은 존재하니 간간히 화제에 오른다.

대문 위를 보니 경오(庚午) 4월 13일 상량이고 목재 색깔이 고택에서 우러나오는 짙은 깊이가 아니라 덜 숙성되어 그리 오래되지 않아 연대를 추정해보았다. 예전에 조그만 대문이 있었더라도 큰 사랑채 지으려면 통로가 필요하다. 담을 허물거나 대문을 뜯는다. 그리고 집을 짓고 대문을 만들지 대문 만들고 짓지 않기 때문에 1870년(경오년)과 1990년(경오년)은 아닐 테고 1930년(경오년)에 지금의 대문을 세웠을 것이다.

경주에 지천으로 널려있는 신라시대 석물들을 보면 인공으로 가공한 뒤부터 연대를 추정하는데 천년의 세월이 흐른 흔적과 700년, 500년은 확연히 다르다. 오류헌은 지례마을 입향조 지촌 김방걸(1623~1695)의 3남 목와 김원중(1658~1724)이 21살 때인 1678년에 지은 집이다. 이 오류헌 고택도 지레마을에 있던 것을 임하댐 건설로 이곳 임하마을로 옮겨온 것인데 1920년 사랑채를 개축했다고 써놓았다. 대문에 들어서자 넓은 마당에 석물들이 여기저기 놓여있고 긴 사랑채가 큰 규모로 앉아있다. 정원과 새로 지은 5칸 사랑채에서 안채가 주는 약간 어눌하면서 순박한 모습의 고택과는 엇박자지만 건축이란 어느 것이 옳고 그른 것은 없다, 시대에 따라 건축주의 필요에 의해서 지어지는 것이다. 다만 아름답거나 실용적이냐의 차이와 집의 격이 따를 뿐이다.

오류헌 대문에서 오른쪽 가까이 논가에 홀로 서 있는 임하리 3층 석탑이 묘한 여운을 준다. 예전에 필자가 안동 동편으로 답사 오면 내앞(천전)마을과 여기 임하리 3층석탑 보러 왔다가 국탄댁, 이우당, 오류헌을 둘러보는데, 오늘은 고택 보러 왔다가 곁눈질하여 탑을 보고 간다. 이 석탑에서 좌우로 보면 이 세 고택이 시야에 안기는데 신라, 고려시대 불교천지에서 조선의 유교, 유학의 세상으로 공간의 이동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화려한 아름다움의 이우당.
화려한 아름다움의 이우당.

#. 소박한 치헌 고택과 내앞 마을

푸른 물결 잔잔히 흐르는 임하교를 건너 내앞 마을 치헌 고택으로 갔다. 이 고택도 지례마을이 수몰지역이라 이곳으로 1988년에 옮겨왔다. 30년을 훌쩍 넘겨 이 마을과 어색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어우러졌다. 한눈에 소박하고 담박하여 군더더기 없이 나를 내세우지 않는 고택 같아 정겨움이 밀려온다. 반면에 하루하루 먹거리의 현실과 이상적인 선비의 도 사이의 괴리현상에 고뇌하는 가난한 선비의 집 같아 마음이 아련하다. 벽채도 보통의 기와집처럼 하얀 회벽이 아니라 누런 황토흙벽이라 몹시도 정감이 가면서 마음이 짠하다. 정원도 깔끔하게 잘 가꾸어 놓았는데 유독 붉은 철쭉꽃이 파리한 선비의 붉은 열정 같은 느낌이다.

안채도 조그마한 정면 4칸, 측면 1칸의 맞배지붕이라 공간이 협소하여 툇마루도 없고, 1칸의 청마루만 있는 조촐하고 단아하다. 대문달린 사랑채도 좌우로 2칸의 맞배지붕에 측면 1칸이라 공간이 협소하고 아담하고 긴 ‘-’자 형이다.

이 고택은 국탄 김시정의 셋째 아들인 치헌 김영운(1765~1841)이 정조 9년(1785)에 21살 때 분가하면서 지은 집이다. 묘하게도 오류헌 고택은 지촌 김방걸의 셋째 아들 김원중이 21살 때 지었고, 치헌 고택도 국탄 김시정의 셋째 아들 김영운이 21살 때 지은 집이다.

주인은 1년에 두세 번 오고 강릉서 몇 달 전에 와서 고택 관리하면서 행랑채에 산다는 분께 집을 잘 가꾸어 보기 좋다고 인사드리고 내앞 마을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골목마다 사람 없고 간간히 보이는 분들은 마스크로 무장하여 코로나 시기의 일상을 보여준다. 단체와 가족단위의 답사객들도 없으니 여느 농촌과 마찬가지로 젊은이도 아이들도 보이지 않는다.

귀봉 종택은 귀봉 김수일의 아들 김용(1557~1620)이 역사의 한 페이지를 장식한다. 1590년 과거에 합격했으나 잠시 벼슬하다 병으로 낙향하였다. 얼마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임금(선조)이 피난간 곳으로 달려가 왕을 호종 하면서 매일의 일상을 기록한 호종일기(1593,8~1594,6)가 중요한 자료가 된다.

 

오류헌 대문채.
오류헌 대문채.

또 하나 눈물겨운 존경의 마음으로 보아야 될 것이 백하 김대락(1845~1914) 독립운동가의 고택 ‘백하구려(白下舊廬)’다. 천석꾼 집안의 전 재산을 팔아 서간도로 이주하여 독립 운동한 김대락이 1885년에 지은 집이다. 1907년 자 신의 집을 협동학교 교사(校舍)로 내주고 1910년 한일합방이 되자 경제력과 학문을 두루 갖춘 집안이었지만 타민족의 지배하에 살 수 없다고 만삭의 손부와 67살의 행동하는 선비 김대락은 정이 묻은 이곳을 떠난다. 여형제 김우락 여사는 초대 국무령 석주 이상룡의 아내로, 여동생 김락 여사는 단식 순국한 향산 이만도의 며느리로, 남편 이중업은 파리장서사건 주도한 독립운동가 아내로, 독립운동한 집안이라 향기가 깃든 곳이다.

이 마을에서 기려야 할 또 한 분이 무장 독립운동단체 서로군정서 참모장 김동삼(1878~1937) 선생이다. 만주와 상해 임시정부서 특출한 활동을 하다 만주사변 뒤 일본 경찰에 체포돠어 1937년 서대문 형무소에서 옥사 순국한다. 그의 생가 입구에는 마스크 낀 동네분들이 협동으로 모내기할 볍씨 준비에 한창이고 몇 발자국 옮기면 태극기 펄럭이고 ‘독립운동가 김동삼 선생 생가터’ 표지석만 선생을 위로하고 있었다. 마당에는 산불조심 깃발 단 트럭 한 대와 개 한마리 앉아있고 화단에는 감잎이 연노란 새싹을 틔우고 있었다.

마을 옆에 한옥으로 잘 지은 경북독립운동기념관이 지난 3월에 왔을 때도 오늘도 휴관이라 언제쯤 보이지 않는 코로나로부터 독립할지, 독립운동 산실의 내앞 마을에서 염원해본다.

/글·사진 =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