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지례예술촌과 지촌 김방걸

위에서 본 지례예술촌.
위에서 본 지례예술촌.

할아버지의 재력과 아버지의 무관심, 엄마의 정보력이 지금시대에 최고의 조건이라지만, 산업화 이전 1980년대 까지만 해도 잘난 조상 덕에 ‘에헴’ 하면서 폼 재고 살았다. 주로 조선시대 학식이나 벼슬로 이름을 알린 조상이 한명 나오면 중시조가 되어 그 이름의 음덕으로 오늘까지 긍지를 갖고 산다. 중시조에서 시조보다 더 큰사람이 안 나오면 경주최씨 설씨 등과 같이 신라 최치원과 원효와 설총까지 소급하여 이어온다. 해남 윤씨들은 고산 윤선도로, 손소, 손중돈, 회재 이언적은 양동 손씨, 양동 이씨의 후손들은 자부심을 안고 살았다. 안동은 유독 중시조가 많다. 진성이씨는 퇴계 이황, 안동김씨는 고려의 김방경, 풍산류씨는 서애 류성룡, 의성김씨는 학봉 김성일, 영천이씨는 농암 이현보, 그리고 중시조에서 방계로 뿌리에 뿌리를 물고 이어져 거대한 문중이 된다. 지촌 김방걸도 의성김씨 지례 입향조가 된다. 그 흔적이 지례예술촌이다.

 

산책 길옆의 봄이오는 임하댐.
산책 길옆의 봄이오는 임하댐.

#. 장희빈과 남인, 지촌 김방걸

인물은 그 시대와 밀접한 인연을 가진다.

의성김씨가 임하댐을 중심으로 문중으로 번성한 것은 김만근(1446~1500)이 임하현 일대 강력한 기반을 가진 해주오씨 오계동 집안에 장가들어 처갓집 재산을 물려받고 내 앞(川前)에 정착하고부터다. 이와 같이 조선시대 큰 문중 대부분이 처가살이하여 처가재산을 물려받았거나 아내의 지참금으로 부를 형성한다.

김만근의 손자 청계 김진(1500~1580)은 자신의 입신을 포기하고 아들 교육에 헌신하여 다섯 아들(약봉 극일, 귀봉 수일, 운암 명일, 학봉 성일, 남악 복일)을 퇴계 문하에 보내 모두 과거에 합격시켜 명문가 반열에 오른다. 청계는 아내를 일찍 잃고도 젖 달라고 우는 아이를 양손에 부둥켜안고 나오지 않는 자신의 젖을 물려 울음을 그치게 했던 눈물겨운 부성애를 갖고 있었다. 지촌 김방걸의 고조부가 청계 김진이고 증조부가 약봉 극일이다. 지촌 김방걸은(1623~1695)은 인조(1623~1649) 원년에 태어나 숙종 때 활약한 인물이다. 38세에 과거 병과에 급제하여 주로 사간원 성균관 등 언론과 학계에 머물었던 언관으로 50대 초부터 21년간 숙종과 인연을 맺어 전남 화순 동북 귀양지에서 73세에 죽는다.

 

지촌제청.
지촌제청.

숙종 하면 장희빈과 사랑 놀음과 착한 인현왕후로 각인되지만, 숙종은 5군영과 남한산성, 북한산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하였고, 세금폐단을 획기적으로 막은 대동법을 전국에 확대했다. 이처럼 군사와 경제에 큰 업적을 쌓았지만 여인의 치마 속에 가려졌다. 숙종의 여인 장희빈(장옥정)과 인현왕후는 둘 다 왕비가 되었다가 폐위되었다. 인현왕후는 34살에 죽고, 장희빈도 42살에 사약을 받고 죽은 시대가 낳은 비극의 여인들이었다.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은 서인(노론)의 핵심이었고, 장희빈의 숙부 장현은 왕의 통역관으로 무역으로 오빠 장희재와 서울에서 돈(현금)이 가장 많았던 중인출신이었다. 안동선비들은 동인에서 남인세력으로 장희빈과 운명을 같이했다. 선조 때 김효원과 심의겸으로 동인, 서인으로 갈라진 붕당이 동인은 정여립 사건 때 서인은 숙종 6년(1680) 경신대축출 때 남인을 강하게 처벌하자는(노론), 온건하게 하자는(소론)으로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 서로 다투다 숙종 때는 극에 달한다. 그런데 김효원 심의겸 둘다 퇴계의 문하생이었다.

장희빈이 아들(경종)을 낳아 세자로 책봉되고 인현왕후가 폐출(1689년)되자 지촌 김방걸은 언관으로 책임을 느껴 낙향한다. 장희빈은 왕비가 되고 기사환국으로 남인 천지가 된다. 5년 뒤 숙종은 폐위시킨 인현왕후를 복위시키고 남인들을 대거 숙청하는 갑술옥사(1694)때부터 온 조선천지는 노론, 소론세상이 되고, 영남의 남인세력들은 몰락한다. 이때 ‘구운몽’의 저자 남구만은 소론의 우두머리가 되어 영의정이 된다.

72세의 대사성(지금의 국립서울대 총장) 김방걸은 갑술옥사 때 고향 지례로 귀향하지만 며칠 만에 화순 동북으로 귀양 가서 독서로 나날을 보내다 73세의 일기로 죽는다.

정치란 생물과 같아서 이해관계에 따라 변한다. 숙종은 장희빈의 매력에 빠지기도 했겠지만, 역관집안에 현금 제일 많은 부자의 딸이고. 청나라와도 긴밀한 관계가 있어 숙종에게 도움이 되었고, 역관 즉 중인층의 지지가 왕권 강화에 필요했을 것이다. 그러나 중인층의 지지가 노론, 소론으로 기울자, 숙종도 장희빈과 남인을 버렸다. 장희빈은 친정 쪽의 재력을 이용하여 남인들을 업고 정권을 잡으려다 실패한 것이다.

 

담담한 격이 흐르는 지촌 종택.
담담한 격이 흐르는 지촌 종택.

# 지례예술촌은 어떤 곳인가

임하댐을 끼고 천천히 달렸다. 댐 위에 망향비를 보니 함께 살았던 한실댁, 대추월댁, 유천댁, 원촌댁, 주실댁, 각골댁, 동골댁, 곰모댁, 턱골댁, 마질댁, 추월댁…. 밑에 류건원, 하식, 갑이, 봉년, 앙팔, 병태, 태수 오봉, 영복…. 이름이 빽빽이 적혀 있었다. 여기 실향민이 아닌 필자도 마음이 울컥거리는데 여기 살았던 실향민들은 고향 잃은 상실감에 얼마나 마음이 아리고 쓰릴까? 갈 수 없는 고향은 희망이라도 있지만, 사라진 고향은 말로 표현하기 힘든 상처일 것이다.

필자는 1987년부터 한국문화유산 답사회 초대 총무로 유홍준 대표와 회원들과 전국으로 기행할 때와 울산시민역사기행 대표를 할 때 지례예술촌을 90년 초에, 단체로 두 번 숙박했었다. 그때는 버스로 비포장 길 산속을 한참 돌고 돌았던 기억이 떠오른다. 오늘은 아스팔트로 잘 닦여진 대낮에 산천을 음미하면서 천천히 갔다. 입구에 들어서자 흩어져있던 문중의 비석들을 모아놓고 지촌 김방걸 유허비를 크게 세워놓았다. 평소 습관대로 전체를 보고 느끼기 위해 산책로 따라 시계반대방향으로 돌았다. 곳곳에 시인 김종길 촌장답게 아름다운 시를 세워놓아 시심을 자극한다. 호수(임하댐)의 물결은 보드랍게 속삭이듯 고요하다. 도화꽃 춘정에 몸부림치니, 산 벚꽃 하얀 속살도 봄바람에 흐느껴 나그네의 발길을 멈추게 한다.

“석양에 장대들고 낚시터로 내려가니./ 폭포에 산들바람 버들 솜이 휘날리네./ 모래위의 갈매기야 날아가지 말게나./ 너를 해칠 마음 없어진지 오래거니./”

지촌 김방걸의 ‘낙연(도연폭포)조어(落淵釣魚)’시인데 오늘 같은 봄의 정경이다. 여기에서 오른쪽 산 넘어 임하댐에 수몰되어있는 도연폭포에서 직계증손자 난곡 김강한(1719~1779)과 고손자 낙유재 김시기(1751~1779)의 비극적인 죽음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재야선비 김강한이 3월 21일에 죽자 장례는 5월 23일로 정했으나 장례날이 가까워오자 계속되는 장마에 강 건너가 장지여서 앞당겨 장례를 치른다. 상주 김시기는 상여에 올라가 관을 붙들고 불어난 강물을 건너다 센 물살에 상두꾼들은 급류에 휘말리자 상두꾼들은 상여를 내버려두고 헤쳐 나왔지만, 아들은 뛰어내리지 않고 상여를 붙잡고 가다 도연폭포 아래로 곤두박질 쳤다. 나라에서 효자명부에는 올렸지만 자신의 목숨과 바꾼 효였다. 1965년 7월 고려대불교학생회에서 상원사 보산스님 다비식에 참석하고 내려오다 불어난 계곡물을 건너다 10명이 급류에 휩쓸려가 죽은 사건이 떠오른다.

동쪽 산등성이 오르자 포크레인을 동원하여 묘를 단장하고 있었다. 조상숭배가 극에 달한 안동을 보는 것 같았다. 고택 뒤에는 소나무 한그루가 아래 고택을 지켜주고 있는 듯하다. 미인은 혼자 외롭게 있을 때가 아름답듯이, 소나무도 한 그루 쓸쓸히 있을 때가 고독한 아름다움을 풍긴다.

 

귄위적인 지산서당.
귄위적인 지산서당.

건물들을 살펴보았다. 지촌이 40세 무렵에 지은 안채와 바깥채는 소박하면서 담담한 기품을 풍긴다. 지촌 사후에 지은 지촌제청 건물도 엄청 크고, ‘지산서당’ 건물은 웅장하고 어깨 힘이 잔뜩 들어간 위압적인 형상이다. 기둥도 너무 굵고 다포식의 화려한 절집 같아 권위적인 사또가 집무를 보는 동헌 같다. 이 모든 건물을 임하댐 수몰지 지례마을(아래 200m)에서 옮겨지어(1985~1989) ‘지례예술’을 만든 시인 김원길 촌장의 집념이 대단하다.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 모르는 코로나 정국이라도 다른 고택들은 대문은 열려 있었는데, 여기는 굳게 닫힌 대문에 ‘숙박 손님 외 절대 출입금지’문구가 무릉도원에 왔다가 갑자기 속세의 현실로 나를 안내했다.

필자가 경북의 종손, 종부들 대상으로 특강할 때, 촌장님도 같은 날 강의를 했고 밤새 술잔을 나누었던 인연이 있기에, 인사나 하려고 대문을 두드렸다. 촌장님은 없고 손자와 며느리는 경계하는 표정으로 들어가 남편을 보내 맞이한다. 내가 더 미안해하고, 번갯불에 콩 튀기듯이 가볍게 빨리 보고 나왔다.

/글·사진= 기행작가 이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