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홍성식<br /><br />기획특집팀장
▲ 홍성식 기획특집팀장

얼마만한 국민적 지지를 받았건, 어떠한 형태의 열광과 우려를 발생시켰건 결론만을 말하면, 정권이 바뀌었다. 대한민국은 새로운 대통령을 맞이했다.

누구라 특정인을 지목할 필요도 없다. 기자의 기억 속에서 취임식 단상에 오른 대통령 모두는 예외 없이 `국가의 품격`과 `인간다운 삶`을 이야기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박근혜. 이제는 이름 앞에 `전직` 혹은 `고(故)`라는 단어가 붙어 불리는 사람들.

그들이 말한 `국가의 품격`이란 뭘까? 한국은 전례가 없을 만큼 `압축적 경제성장`을 이뤄온 나라다. 한적한 시골에도 쭉쭉 뻗은 아스팔트길이 깔리고, 고속열차가 허리 잘린 국토의 최북단에서 최남단까지를 2시간 30분이면 달려간다. 초등학생부터 칠순 노인에 이르기까지 국민의 대부분이 스마트폰을 이용해 `정보의 상향평균화 시대`를 누리고 있고, 초고속 인터넷망 설치율은 영국과 미국을 가뿐히 넘어선다. 문맹률도 세계 최저 수준. 뿐인가. 서울 하늘을 찌를 듯 들어선 마천루(摩天樓)는 외국인 관광객의 탄성을 불러낸다.

그러나 이런 외형적·양적 성장만으로 `국가의 품격` 즉, 국격이 높아지는 것일까? 이 물음에 흔쾌히 “그렇다”고 답하기는 어렵다. 왜냐? 품격은 내면적이고 질적인 성장을 동반해야 그 저울이 한쪽으로 기울지 않기 때문. 경제적 발전과 양적인 팽창만큼 중요한 것이 문화적 역량강화와 질적인 변화다.

프랑스 전직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은 `하나로 이어지는 유럽`의 초석을 깔았던 사람이다. 사후 20년이 넘었지만 그의 정치·경제적 혜안과 외적 카리스마를 부정하는 프랑스인은 드물다. 그러나 그를 보다 깊이 있게 기억하는 이들은 “미테랑은 대통령의 과중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틈만 나면 엘리제궁 조그만 방에서 소설을 썼던 사람”이라고 말한다.

과문해서인지 모르겠다. 앞서 언급된 한국의 대통령 중 연설문에 이름 없는 시인의 시를 인용하거나, 근사한 소설의 문장을 기자회견에서 사용해 문화적 소양을 보여준 이를 기억하지 못한다.

한국정치가 문치(文治)가 아닌 막말과 멱살잡이의 `부끄러운 추억`으로 남은 것은 통치권자의 문치(文癡)가 이유이지 않았을까? 이번에 대통령으로 선출된 사람에게 감히 권유한다. “예술인 블랙리스트나 화이트리스트를 만들 시간에 시집을 펼치고, 소설을 맛보시라. 그 안에 국가의 품격을 높일 해답이 들어있으니.”

그리고 전직 대통령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해온 나머지 하나 `인간다운 삶`. 인간의 존엄을 지킬 기본조건 중 하나는 `타의에 의해 죽음을 맞지 않을 권리`다. 그러나 세상엔 아무 죄 없이 죽어가는 사람들이 흔하다. 특히, 저항할 수 있는 물리적 힘이 부재한 아이와 노인의 죽음은 부정할 수 없는 인류의 비극이다.

비행기를 타고 20시간이면 지구 반대편까지 갈 수 있는 21세기. 이제 세계는 `한 지붕 아래 식구`다. 그렇기에 한국에서의 죄 없는 죽음만이 슬픈 건 아니다.

2011년 시작된 시리아 내전. 젖먹이 아기와 팔순 노인이 언제 어디서 날아올지 모를 러시아와 미국의 미사일에 매일을 눈물과 한숨 속에서 보내고 있다. 이미 수천, 수만의 아이와 노인이 죽었다.

독재자 바샤르 알 아사드(1965~)의 정부군을 지원하는 러시아와 중동 지배정책의 일환으로 시리아 반군을 돕는 미국. 한국은 그 사이에 엉거주춤하게 서서 아이들의 처참한 상황을 모른 체하며 등 돌리고 있다. “국익을 생각해야 한다”는 변명을 내세우며.

바뀐 한국의 대통령은 이 무관심과 반인본주의에 맞서 이렇게 말했으면 한다. “대체 어떤 국익이 아이들의 목숨에 우선할 수 있는가? 미국과 러시아는 당장 포격을 멈추고 평화협상에 나서라. 이것이 `인간적인 삶`의 가치를 무엇보다 중히 여기는 우리 국민들의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