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대 박정희 대통령이 `경주`를 `서라벌`로 되돌려놓으려 했다. 일본의 나라시처럼 완벽한 고도(古都)로 만든다는 복안이었다.

당시 신문 1면 기사는 온통 `경주 발굴 유물 기사`였다. 천마총지역은 당시 `고분 사이 사이에 낀 초가집마을`이었고, 담장 고치다가 금귀고리를, 구들장 놓다가 금가락지를 찾을 정도였다. 그때 “발굴을 서두르는 것은 위험하다. 지금의 발굴 복원 기술은 미흡하다. 과학이 발달할 미래에 얻을 수 있는 정보를 많이 잃을 것”이란 우려도 많았지만 대통령을 말릴 수 없었다.

실제 천마총 발굴 과정에서 철기·금속유물 상당수가 손상됐다. 당시의 처치기술은 지금에 비해 많이 저급했다.

박 대통령은 국내 최대의 고분인 황남대총 발굴을 지시했고 김정기 문화재연구소장은 “섣불리 대형 고분을 파헤치기보다 연습으로 근처 작은 고분부터 파봅시다”고 건의해서 `천마총 발굴`이 시행됐다.

그때 발굴된 `천마도`는 세계 고고학계를 발칵 뒤집었다.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겹 포갠 후 거기에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이 1천 수백년이 지나도 색깔 하나 변하지 않았다. 자작나무는 기름기가 많아 불에 탈 때 `자작 자작` 소리를 낸다 해서 지어진 이름. 기름기 덕분에 오랜 세월이 지난 후에도 변질되지 않았다. 그 천마총은 `유물전시관`으로 복원되고, 대능원(大苑)이란 대통령의 친필현판을 달았으며 경주 경제를 떠받치는 새 관광자원이 됐다.

`경주 발굴 복원사업`은 1979년 박 대통령의 서거로 중단됐고 2012년 대선 때 박근혜 후보의 대선공약이 되면서 선대(先代)의 유업을 계승하게 됐다. 2014년 발굴 복원 계획과 함께 예산이 세워져 지금 사업이 진행중이다.

그러나 `반대목소리`도 요란하다. “현 정권 때 아니면 기회가 없다며 서두르는 바람에 고도 경주를 망친다”는 것이다. 정부가 하는 일에 `반대`는 항상 있다. 그 소리 듣다가는 한 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발굴작업에 참여하지 못한 자들의 반발에 연연하지 말고 세상이 놀랄 성과를 내야 한다.

/서동훈(칼럼니스트)

    서동훈(칼럼니스트)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