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
⑶ 천년의 세월, 흥덕왕과 김유신을 지킨 십이지신(十二支神)

▲ 경상북도 경주시 안강읍에 위치한 흥덕왕릉.

몇 해 전. 오스트리아 비엔나를 여행하며 슈테판성당의 웅장함에 놀랐던 적이 있다. 높이가 137m에 달하는 첨탑의 위용과 `인류 역사상 최고의 작곡가`로 불리는 모차르트의 결혼식과 장례식이 겨우 9년 간격으로 열린 역사적 장소라는 드라마틱한 사실은 비엔나를 찾는 수많은 관광객들을 그 도시에 매력에 빠지게 한다.

왕비 장화부인과 합장무덤으로 추정되는 흥덕왕릉
돌사자와 무인·문인석까지 신라 조각기술 정수 만끽
삼국통일 주역 김유신 장군묘도 여느 왕릉 못잖아

슈테판성당의 내·외부를 장식하고 있는 조각상들 역시 사람들에게 인기다. 안톤 필그람 등이 만든 것으로 알려진 화려하고 매혹적인 부조(浮彫)는 동유럽 예술역사의 한 정점으로 평가받고 있다.

 

▲ 김유신 장군의 묘. 십이지신을 새긴 조형물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 김유신 장군의 묘. 십이지신을 새긴 조형물이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비엔나는 해마다 수백 만 명의 여행자들을 끌어 모으는 관광의 도시다. 그 힘의 배후 중 하나가 바로 슈테판성당이고, 성당 안팎의 새겨진 빼어난 조각품들이다. 그렇다면 경주에는 이 정도의 매력을 가진 `관광 상품`이 없을까? 결론부터 말해보자. “있다.”

흥덕왕은 신라의 42대 임금이다. 38대 원성왕의 손자로 태어난 그의 능은 경주시 안강읍 육통리 한적한 소나무 숲 속에 위치해 있다. 용장 장보고에게 군사 1만 명을 주고 청해진 사수를 지시했던 흥덕왕은 중국에서 들여온 차(茶)를 우리 땅에 재배해 `차 문화`를 대중화시킨 문무를 동시에 갖춘 왕으로 평가받는다. 오래 이어진 가뭄과 흉작에 신라에 대기근이 찾아왔을 때는 국법으로 사치를 금한 어진 지도자이기도 했다.

흥덕왕릉을 찾았던 초봄. 일대는 소나무재선충 방재활동이 한창이었다. 소설가 강석경은 산문집 `능으로 가는 길`을 통해 경주 외곽 인적 드문 곳에 자리잡은 흥덕왕릉 앞 소나무 숲을 이렇게 표현했다.

“햇빛을 향한 경쟁 때문인지 용틀임하듯이 뻗어 올라 하늘을 가린 소나무 숲을 나서면 초록의 능원이 눈부시게 펼쳐진다.” 묘사로 미루어볼 때 작가는 아마도 여름에 이 왕릉을 방문한 듯하다. 울울창창한 송림에 에워싸여 1천200년이 가까운 시간 동안 조용히 잠들어있는 왕.

 

▲ 경주시 충효동에 자리한 김유신의 묘 앞에 세워진 비석.
▲ 경주시 충효동에 자리한 김유신의 묘 앞에 세워진 비석.

하지만, `소리 없는 왕의 영면`과는 별개로 흥덕왕릉 일대는 살아 뛰는 생명력으로 가득하다. 각기 다른 기묘한 형상으로 수백 년 세월을 살아낸 소나무의 지칠 줄 모르는 푸른 에너지가 그렇고, 왕릉 주위를 호위하듯 서있는 무인석과 문인석의 생동감 넘치는 표정이 그렇고, 왕의 무덤을 호위하듯 둘러싼 십이지신의 돋을새김이 또한 그렇다.

1963년 사적 제30호로 지정된 흥덕왕릉은 현존하는 신라의 왕릉 중 형식면에서 비교적 온전한 형태를 갖춘 능이라는 역사학계의 평가를 받고 있다.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의 기록에 의하면 왕비 장화부인(章和夫人)과 합장한 무덤으로 추정되며 규모 역시 크다. 봉분 아래 판석(板石·널판같이 뜬 돌)을 세웠고, 능을 빙 둘러싼 호석(護石·능이나 묘의 둘레에 돌려 쌓은 돌)에는 십이지신상을 조각했다.

봄 햇살 아래 그 모습을 드러낸 십이지신상은 바로 엊그제 만든 것처럼 표정 하나하나가 생동한다. 그 정밀함과 섬세함이 슈테판성당의 부조보다 결코 덜하지 않다. 천년 세월을 훌쩍 넘어 신라미술의 미려함을 현대인들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

 

▲ 흥덕왕릉 입구는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다.
▲ 흥덕왕릉 입구는 소나무 숲이 장관을 이룬다.

`십이신왕`이란 별칭으로도 불리는 십이지신은 불교 신자들을 보호하는 신장(神將)으로, 사람의 몸에 호랑이·토끼·용·뱀·말·소·원숭이·닭·돼지·개·쥐·양의 얼굴을 하고 있다. 삼국통일 이전에는 나라를 지키는 신으로까지 숭배되던 십이지신. 바로 이 열 두 동물이 죽은 흥덕왕과 왕비를 지키고 선 것이다. 자그마치 1천200년 동안.

십이지신상 외에도 흥덕왕릉 주변에는 돌사자와 무인석, 문인석, 그 위에 비석을 세웠던 커다란 거북 모양의 조형물이 방문객들을 반갑게 맞이한다. 살아있는 학자의 품격을 그대로 담아낸 문인석과 이국(異國)의 장수를 모델로 깎은 듯한 무인석은 왕릉이 조성됐던 당시 신라가 얼마만한 조각기술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활발했던 서방세계와의 교류 역사까지를 짐작케 해준다.

유럽의 역사·문화유적은 학계의 철저한 고증과 범국가적 지원을 통한 보존정책으로 인해 오늘날 화려한 명성을 얻을 수 있었다. 경주도 문화유산의 고증과 보존에 지금까지보다 더 큰 노력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흥덕왕릉과 그 주변 조형물을 직접 본 사람들은 말한다. “신라의 십이지신 돋을새김이 비엔나 슈테판성당의 부조만 못할 게 무엇인가?”

 

▲ 흥덕왕릉을 둘러싼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중 하나.
▲ 흥덕왕릉을 둘러싼 호석에 새겨진 십이지신상 중 하나.

신화와 전설을 제 몸 안에 고스란히 담은 매혹적인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고분은 흥덕왕릉만이 아니다. `신라태대각간 김유신묘(新羅太大角干 金庾信墓)`라 쓰인 비석이 세워진 경주시 충효동 김유신의 무덤(사적 제21호)을 호위하는 것도 십이지신이다.

삼국시대 역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다면 그 이름은 들어봤을 김유신(595~673)은 신라의 장수로 지금의 합참의장격인 대총관을 맡아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인물. 삼국을 통일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담당한 그의 무덤은 규모와 화려함 면에서 어느 왕릉 못지않다. 봉분의 지름이 30m에 육박하는 이 거대한 묘에도 세밀한 솜씨의 석공이 새겼으리라 짐작되는 십이지신이 꿈틀대고 있다.

흥덕왕릉의 조각들과 마찬가지로 얼굴은 열두 동물의 모습을 하고 있고, 몸은 평상복을 입고 칼과 창 등의 무기를 든 사람 형상이다. `삼국유사`는 이 묘에 관해 “김유신이 죽자 흥덕왕은 그를 흥무대왕으로 높이 모시고, 왕릉의 예를 갖춰 무덤을 장식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경주 출신의 역사학자 이근직(1963~2011)은 그의 저서 `신라왕릉 연구`에서 김유신 묘에 관해 “왕릉과 같은 호석 구조를 하였으나, 석사자상과 석인상은 없다”고 썼다. 흥덕왕릉, 성덕왕릉, 원성왕릉 주변에서 발견된 사자상과 문인·무인석 등이 없는 것은 어떤 이유에서일까?

그것은 아마도 김유신이 당대 최고의 권력자였음에도 `감히 왕의 권위에는 미칠 수 없다`는 왕족들의 자존심이 석상 세우는 걸 거부해서가 아닐까?

오스트리아 슈테판성당의 부조가 지닌 아름다움과 비견할 수 있는 흥덕왕릉과 김유신 묘의 십이지신상을 만나고 돌아오는 길. 문득 시인 김광규의 `묘비명`이란 시가 떠올랐다. 불멸하는 석조 돋을새김을 보며 유한한 인간의 삶을 노래한 문장이 눈앞에 어른거렸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 불의 뜨거움 꿋꿋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 귀중한 사료가 될 것이니...(후략)`.

 

▲ 경주 고분이 가진 매력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는 구창웅 씨.
▲ 경주 고분이 가진 매력을 카메라에 담아내고 있는 구창웅 씨.

사진작가와 관광객 매료시킨 경주의 고분

꽃과 소나무 속의 고분앵글에 담긴 경주의 봄
`이색 풍경`으로 인기

목련과 유채꽃, 개나리와 벚꽃이 만발하는 경주의 봄. 그 향기에 끌려 많은 사람들이 경주로 향하는 버스와 기차에 오른다. 인근 지역에 거주하는 주민들 역시 간단한 도시락을 만들어 가족소풍을 나오는 3~4월의 경주 풍경은 정겹다.

난분분하던 벚꽃이 아쉽게 떨어질 무렵인 4월의 두 번째 주말. 대릉원의 고분과 월성 유적 발굴현장, 월지(안압지) 등을 카메라에 담고 있는 사진작가 구창웅(47) 씨를 만났다. 고등학교 수학여행 이후 근 30년 만에 경주를 찾았다는 구 작가는 “죽은 왕들의 숨결이 봄꽃 속에서 살아나는 듯하다”는 말로 왕릉과 만난 감동을 전했다. 금관총에서 출토된 신라시대 각종 유물에 관심을 보인 그는 “시간이 허락된다면 국립경주박물관에 들러 보다 많은 고대의 보물과 만나고 싶다”는 바람을 전하며, “걸음을 옮기는 곳 모두가 역사의 현장인 이곳에 사는 분들이 부럽다”는 말로 `고분의 도시` 경주의 매력에 흠뻑 빠졌음을 고백했다.

경주고속버스터미널에서 시작해 대릉원과 첨성대를 거쳐, 월성 유적과 월지, 동궁까지 꽤 먼 길을 걸었음에도 곳곳마다 거대한 능()이 솟은 독특하고 생소한 풍경에 피곤한 줄 모르겠다던 구 작가는 “조금 더 나이가 들면 경주 왕릉의 비밀을 주제로 작업을 해 사진전을 열고 싶다”는 미래의 희망을 전하며 카메라 셔터를 바쁘게 눌러 주위 풍경을 담아내는데 여념이 없었다.

첨성대 인근을 노랗게 물들이며 만개한 유채꽃. 동화 속 풍경 같은 그 유채꽃밭에선 초등학교에 다니는 아들과 딸, 아내와 함께 나들이를 나온 대구시민 김남석(39) 씨를 만났다.

“TV와 책 속에서만 보던 거대한 무덤을 본 아이들이 신기하고 놀라워하는 모습이 기특하고 귀여웠다”는 김 씨는 신라의 역사에 대해 잘 알지 못해 아이들에게 충분한 설명을 해주지 못한 것이 아쉬웠던지 “다음에 경주를 찾을 때는 미리 왕릉과 유적에 관한 공부를 좀 해와야겠다”며 웃었다.

봄꽃과 푸른 소나무에 둘러싸인 경주의 고분들. 천년왕국 신라의 향수 어린 풍광은 비단 역사학자와 문화재 전문가들만이 아닌 일반인들에게도 웃음과 꿈을 선물하고 있었다. 아름다운 봄날의 풍경이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저작권자 © 경북매일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