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천년의 비밀 경주 고분을 찾아서
② 숲을 지나 `천년왕국의 비밀` 간직한 오릉으로

▲ 신라의 1대 임금 박혁거세 등이 묻힌 것으로 알려진 경주 오릉. 인근 소나무 숲이 아름답다.

고대의 왕 혹은, 임금 또는, 황제로

불린 이들은 살아있는 동안은

명예와 숭배를 원했다.

자신의 지배를 받는 백성들에게 스스로가

귀한 존재임을 기어코 증명하려 했던 것.

그 존재증명의 욕구는 죽음 이후까지

이어졌다. 한 집단의 지배자로서 오랜 시간 사람들의 기억에 남고 싶었던 것일 테다.

한국을 포함한 아시아에는

이러한 왕의 흔적들이 적지 않게 남아있다.

12세기 초반에 건설된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는 `살아서 누린` 왕의 영화를

짐작케 하는 건축물이다.

당시 크메르제국의 왕들은 신(神)과 자신을 동일시했고, 미려하고 웅장한 공간에 머물며

사람들의 머리 위에 군림했다.

당연지사 왕에 대한 숭배가 뒤따랐다.

중국 산시성에 자리한 진시황릉과 병마용갱은 `죽음 이후` 황제의 욕망을 보여주는

증거물이다. 거대한 무덤과 더불어

사후에 자신을 호위할 병사와

그들이 타는 말까지 흙으로 빚어 도열시킨 진시황의 집착은 권력자가 가진 욕망의

한 단면을 현대인에게 알려주고 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와 알영 왕비
남해왕·유리왕·파사왕 무덤 추정
삼국유사 `뱀무덤` 설화도 전해져
정확한 매장자 두고 논쟁 중

신라는 자그마치 992년간 이어져온 왕조국가였다. 56명의 왕이 순차적으로 나라를 다스렸고, 그들의 흔적은 당대의 유물과 유적을 통해 오늘날까지 전해지고 있다. 규모와 함께 매장된 유물로 볼 때 놀랍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왕릉 역시 대표적인 신라의 유적들 중 하나다.

현재 학계에서 신라 왕릉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은 모두 38기. 이는 과거의 문헌을 오랜 기간 연구하고, 여러 차례에 걸친 발굴조사 등 지난한 과정을 통해 알아낸 것이다.

그럼에도 신라 통치자들의 사망, 장례식, 매장이라는 역사적 사건은 멀게는 2천 년, 가깝게 잡아도 1천 년 전에 발생한 일이라 증언을 해줄 사람이 전무하다. 그렇기에 경주의 능묘(墓)를 둘러싼 비밀은 오늘날까지도 지극히 일부만이 밝혀졌을 뿐이다. 사람들의 궁금증을 부르고, 호기심을 일으킬 만하다.

신라의 첫 번째 임금이었던 박혁거세 거서간(居西干·신라 초기 왕의 호칭). 그가 묻혀있는 것으로 추정되는 경주시 탑동의 오릉(五陵) 역시 이런 역사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고분이다. 3세기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며, 사적 제172호로 지정된 능들.

기자가 박혁거세의 제사를 모시는 오릉 인근 숭덕정과 알영왕비가 태어났다고 전해오는 알영정을 찾았을 땐 찾아온 봄기운에 기지개를 켠 목련이 새하얀 꽃잎을 아름답게 펼치고 있었다. 하늘로 뻗어 오르는 대나무도 푸른 기운으로 가득했다. 박혁거세와 함께 그의 부인인 알영, 2대 남해왕, 3대 유리왕, 5대 파사왕의 무덤까지 5개의 고분이 지척에 위치한 오릉은 사릉(蛇陵)이라고도 불린다. 한자를 해석하면 `뱀무덤`이란 뜻인데, 어째서 왕이 묻힌 곳에 이런 이름이 붙었을까? 이에 관해선 고려의 승려 일연의 편찬한 `삼국유사`에 관련 설화가 전해온다. 그 내용은 이렇다.

 

▲ 박혁거세 왕의 아내인 알영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알영정 근처에 푸른 대나무가 서 있다.
▲ 박혁거세 왕의 아내인 알영이 태어났다는 설화가 전해오는 알영정 근처에 푸른 대나무가 서 있다.

`혁거세 왕은 61년간 나라를 다스린 후 하늘로 올라갔다. 7일 후에 왕의 육신이 땅으로 떨어지고 뒤따라 왕후도 숨졌다. 백성들이 둘을 합해 장례를 치르려했으나, 커다란 구렁이가 나타나 이를 방해했다. 할 수 없이 땅에 떨어져 5조각으로 흩어진 왕의 신체를 각각 장사 지내 오릉을 만들었다. 또한 이 능이 구렁이와 연관됐기에 그 이름을 사릉이라고 했다. 위치는 담엄사 북쪽이다.`

이 기록에 대한 신뢰성 여부는 여전히 논란거리다. 이와 관련 경주학연구원 박임관 원장은 “박혁거세 왕에 관한 기록과 함께 등장하는 `삼국유사` 속 담엄사가 어디인지 아직도 밝혀내지 못했다”며 “혁거세 외에는 구체적으로 누구의 장례를 치른 것인지도 문헌에 등장하지 않는다”는 말로 현재진행형인 `신라 왕릉을 둘러싼 비밀`의 일부분을 소개해주었다.

역사학계에서는 앞서 언급한 왕들과 왕비가 오릉에 묻혀있다는 걸 명확하게 증명할 수 없는 이유로 ◆5개의 무덤 중 하나가 2개의 봉분이 표주박처럼 이어 붙어 있는 표형분(瓢形墳)이라 매장된 인물이 6명일 수도 있다 ◆`삼국유사`의 기록처럼 왕의 몸이 하늘에서 떨어져 다섯 조각으로 흩어진 것을 묻었기에 5개 봉분 전체가 박혁거세의 무덤일 수도 있다 ◆4세기 이전 신라의 무덤은 토광묘 양식으로 만들어진 게 대부분인데, 오릉은 4~6세기경 양식인 적석목곽분의 형태를 취하고 있다는 것 등을 이야기한다.

사실 이런 논쟁 속에 있는 건 비단 오릉만은 아니다. “역사 연구의 특성상 경주에 존재하는 다른 왕릉들 또한 매장자가 정확하게 누구인지 밝혀내기가 쉽지 않다. 오릉은 그러한 논란과 논쟁 속에 있는 왕릉 중 하나라고 보면 될 것”이라는 게 이에 관한 박임관 원장의 부연이다.

신라 왕들의 무덤을 두고 거기에 묻힌 사람이 정확하게 기록된 것인지에 관한 논란은 이미 300여 년 전에도 있었다. 17세기 사학자였던 화계(花溪) 유의건은 그의 책 `화계집`을 통해 아래와 같은 요지의 문제제기를 했다.

“조선 영조 6년(경술년·1730년) 이후 경주의 28기 무덤을 왕릉이라 하고 있다. 그중 17기는 이전에는 몰랐으나 근래 들어 새로 알게 된 것들이다. 1천년 이전의 일에 대한 자취를 살필 때는 문자의 기록에 의해야 한다. 왕릉 속 정확한 매장자는 신라 사람이 죽지 않고 살아있어도 상세히 알기 어렵다. 하물며 그 무덤들이 왕릉인지 아닌지를 역사에 무지한 촌부들에게 물었다니, 그 신뢰성에 의심이 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사람들 사이에서 오가는 저마다의 주장과 이에 따른 논쟁과는 별개로 봄을 맞이하는 오릉과 그 일대 소나무 숲, 그리고 숭덕전 정원은 아름다웠다. 신라는 도처에 산재한 고분을 통해 제아무리 명민한 역사학자와 고고학자라 해도 쉽게 파헤칠 수 없는 `천년왕국의 비밀`을 만들어낸 것으로 보인다. 그 비밀을 풀어낼 열쇠의 제작은 이제 오늘을 사는 우리의 몫으로 남았다.

죽음 이후에도 자신이 통치한 왕국의 기억 속에 남고 싶었던 신라의 지배자들. 오릉 속에서 영원한 잠에 빠졌다고 추정되는 4명의 왕과 1명의 왕비는 `존재하기에 사라질 수밖에 없다`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고 싶었던 것일까.

 

▲ 박혁거세 왕의 제사를 올리는 숭덕전 앞에 목련이 만발했다.
▲ 박혁거세 왕의 제사를 올리는 숭덕전 앞에 목련이 만발했다.

봉황대와 신라 멸망을 둘러싼 전설

고려 왕건의 `스파이` 풍수학자
경주 곳곳 봉분 조성 부추겨
깊은 우물까지 파 `파멸의 길`로

그 크기가 일반인의 무덤 수십 배 혹은, 수백 배를 넘어서는 신라의 고분들. 그중에서도 가장 큰 봉분으로 알려진 것이 바로 봉황대(鳳凰臺·사적 제512호)다. 경주시 노동동 고분군에 속하는 봉황대는 직경이 82m에 높이가 22m로 아이들의 눈에는 작은 산처럼 보일 수도 있을 듯하다. 여기에 누가 묻혀있는지는 아직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다. 봉황대가 미발굴 된 고분 중 하나인 까닭이다. 그러나 인근에 위치한 식리총, 금령총, 금관총 등의 발굴탐사 결과로 미루어볼 때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초반을 살았던 왕 또는, 신라 지배층의 무덤으로 추측된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경주 사람들은 예부터 커다란 무덤을 `봉황대`라 불러왔다. 여기에는 흥미롭고도 비극적인 전설 하나가 떠돈다. 신라의 멸망과 관련된 이야기다.

통일신라의 국운이 기울어가던 무렵. 왕과 고위직 대신들은 사리사욕을 채우려는 자리다툼을 일삼으며 백성을 돌보는데 소홀했다. 인근 국가들이 이를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었다. 궁예를 뒤를 이어 권력을 장악한 고려의 왕건은 당시 사람들이 풍수지리설을 신봉한다는 사실에 착안해 비밀스럽게 풍수학자 한 명을 신라에 보낸다. 스파이 역할을 맡은 이 풍수학자는 신라의 왕을 찾아가 “신라 수도는 봉황의 보금자리처럼 생겼으므로, 왕조의 번성이 지속되려면 봉황이 떠날 수 없게 그 안에 알을 만들어야 한다”고 설득했다. 이 말에 혹한 왕은 백성을 동원해 둥글게 흙을 쌓아 수많은 알의 형상을 경주에 만들었다.

그러나 풍수학자의 말은 거짓이었다. 실상 경주는 봉황의 보금자리가 아닌 배 형상을 하고 있었다. 만들어진 봉황알 모습의 거대한 흙더미는 파도에 휘청거리는 배에 과도한 짐을 싣는 꼴이 돼버렸다. 왕건이 보낸 풍수학자는 알의 형상이 가장 많이 만들어진 미추왕릉 곁 밤나무숲에 깊은 우물을 파고는 고려로 달아나버린다. 침몰하는 배에 구멍을 뚫어버린 것이다. 이후 신라는 급속히 파멸의 길을 걸었다는 것이 이 전설의 요약된 핵심이다. 이때부터 경주 사람들은 거대한 봉분의 형상을 한 흙더미와 함께 왕과 귀족의 무덤을 봉황대라고 칭했다고 한다.

비단 신라뿐일까. 동서양을 불문하고 유구한 세월은 다종다양한 이야깃거리를 만들어낸다. `봉황대의 전설`을 포함해 천년의 역사가 빚어낸 수많은 설화들은 역사·관광도시 경주의 매력에 빛을 더하고 있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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