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2년 수나라는 고구려를 침공했다. 을지문덕 장군은 지연전술로 적군이 지치기를 기다렸다. 결국 적이 후퇴하게 만들었고, 살수(청천강)를 건너는 순간을 노려 협공을 펼침으로써 대승을 거두었다. 이것이 살수대첩. 고려 태조 왕건은 중국 송나라와는 잘 지냈으나 북방 거란족과는 척을 졌다. 거란이 세번째 고려를 침공할 때였다. 거란군이 홍화진을 지날 때를 노려 고려군은 통나무를 쇠가죽으로 묶어 물을 막았다. 거란군이 얕은 강물을 건너는 순간, 쇠가죽을 끊었고 대량의 물이 쏟아져 내려 적은 거의 전멸했다. 이것이 귀주대첩이다.

1951년 6·25가 한창일 무렵, 인민군은 북한강 화천댐을 점령하고 수공(水攻)으로 미군에 피해를 입혔다. 이에 미군은 전투기로 댐 수문을 폭파했고 이듬해 6월 압록강 수풍댐을 폭격으로 날려버렸다. 당시 수풍댐은 길이 900m에 달하는 동양 최대 규모였고 북한 전역에 전기를 공급했는데 폭격 후 북한군의 전력(戰力)은 현저히 감소했다. 그 후 30년이 지난 1986년 10월 북한이 금강산댐 건설계획을 발표했다. 저수용량이 200억t인데 이것으로 수공을 펴면 서울은 물바다가 된다. 우리측은 곧바로 `평화의 댐` 건설을 추진한다. 그 쏟아져 내려오는 물을 받아 모을 댐이었다. 2009년 8월 휴가철, 북한이 임진강 상류 황강댐 수문을 예고 없이 갑자기 열어 우리 측 어부 6명이 숨졌다.

이것이 한반도에서 벌어진 수공의 사례들이다. 물이 공격무기가 된 역사는 깊다. 오늘날 지구촌이 물부족현상을 보이자 자치단체 간 물분쟁이 일상화됐다.

서부 경남 남강댐의 물을 동부 경남과 부산으로 보내는 통수관을 건설하는 문제를 놓고 분쟁이 벌어져 고위 공무원들이 직위해제되기도 했다.

경북 영덕 산계곡의 물을 포항지역 산업용수로 보내는 문제를 놓고 갈등이 벌어졌다. 기후변화로 강우량은 줄어들고 물 사용량은 불어나니 물분쟁은 불가피하다. `수공`의 시대를 지나 `물분쟁`의 시대로 들어섰다. `용수 개발과 물분배` 문제가 눈앞의 과제로 등장했다.

/서동훈(칼럼니스트)

    서동훈(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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