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강희룡<br /><br />서예가
▲ 강희룡 서예가

손양(孫陽)은 춘추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말의 관상을 볼 줄 아는 사람이라서 말을 보면 비록 비루먹어서 아무리 비실거리는 말이라도 그 말이 천리마임을 알아내는 혜안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래서 그를 일컬어 별칭 백락이라고 했다. 백락(伯樂)이란 본래 천상(天上)의 별자리 이름으로 천마를 관리하는 책임을 맡고 있다. 백락(伯樂)이 지었다고 하는 `상마경`은 말의 관상을 보는 관상도감이다. 당(唐)시대 대 문장가이며 정치인이던 한퇴지는 `세상에 백락이 있은 다음에 천리마가 있는 것이니 천리마는 항상 있으나 백락은 항상 있지 않다`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백락이 지나간 곳에는 명마가 남아 있지 않아 명마를 모두 뽑아갔다는 뜻이며 하루에 천리를 달린다는 명마는 어느 시대에나 있지만 그 명마를 알아보는 백락 같은 사람은 좀처럼 없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도 올바른 인재는 대대로 끊임없이 나타난다고 했지만 언제나 이러한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문제였다.

토정 이지함(1517~1578)은 목은 이색의 후손으로 검약하고 절제 있는 삶으로 일관했다. 그는 조선의 내로라하는 명문가문이었지만 `토정`이라는 흙집에 살았다. 젊은 시절 유학(儒學) 경전은 물론 역사서, 제자백가서까지 섭렵한 토정은 어느날 돌연 과거에 나가지 않겠다고 결심한다. 이에 대해 `선조실록`에는 과거에 급제한 이웃이 요란하게 잔치를 베푸는 것을 보고 천하다고 여겨 과거를 포기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토정 선생이 포천 현감에 임명됐을 때 베옷과 짚신, 포립(布笠) 차림으로 관청에 출근했다. 관아의 아전이 음식상을 올리자 선생은 한참을 살피더니 젓가락도 대지 않고 `먹을 게 없구나` 했다. 아전이 뜰에 무릎을 꿇고 `고을에 특산품이 없어 밥상에 별미가 없습니다`라며 다시 상을 차리겠다고 했다. 얼마 뒤 진수성찬이 올라왔다. 선생은 다시 한참을 들여다본 뒤 똑같은 말을 했다. 그러자 아전이 두려워 떨며 죄를 청했다. 선생은 `나라 백성들은 생계가 곤궁한데 모두들 앉아 먹고 마시며 절제가 없다. 나는 밥상에서 식사하는 것을 싫어한다`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잡곡밥 한 그릇과 우거짓국 한 그릇만을 삿갓 상자에 담아 올리라 했다. 다음날 관리들이 와서 인사를 할 때 시래기죽을 쑤어 권했다. 관리들은 고개를 숙이고 수저를 들었으나 먹지를 못했고 선생은 죽을 다 먹어치웠다.

오늘날 토정이 유명하게 된 것은 `토정비결`이다. 정초가 되면 생년월일과 주역의 괘를 이용해 한해의 운수를 점친다는 바로 그 책이다. 이 책이 토정의 저서로 알려져 있지만 `토정비결`이라는 책이 19세기 이후에 보이는 점을 들어 누군가가 토정의 이름을 가탁했을 것으로 추론된다. 훗날 역술가가 그 비결을 지으며 `주역`에 능하고 민초들과 동고동락한 토정을 필자로 내세웠다는 얘기도 전해진다. 맹자는 `마음을 수양하는데 욕심을 적게 가지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 없다`고 기술하고 있다. 토정 선생 역시 가장 경계한 것은 욕심이었다. 그의 문집 `토정유고`에 실린 글은 시 2편, 논설 3편, 상소문 2편이 전부다. 논설 가운데에 포함된 `과욕설(寡欲說)`은 토정의 좌우명이라고 할 정도로, 토정의 철학이 잘 드러난다.

“자본주의에 물들어 있는 현대인들은 욕심은 본능이며 추구할수록 커진다”고 말한다. 그러나 토정은 욕심이 인간의 본성일지라도 부단히 줄여간다면 무욕(無慾)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강조했다. 지금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백락에게 뽑힌 토정 같은 인재의 발굴인데 출세하기에 급급한 자들이 신의를 버리고 수단과 방법을 안 가리고 떼 지어 몰려다니며 사회를 어지럽히는 현실에 국민들은 크게 실망하고 있는 듯하다.

벼슬과 학문의 관계에 대하여 주희(朱熹)는 `이치는 같으나 일이 다르다`했다. 인성과 학문이 이뤄지기 전에 개인의 영달을 위해 출사하는 사람들은 아직 국가를 경영할 준비가 되지 않았다는 완곡한 표현이다. 500년 전 토정이 남긴 진짜 `토정비결`은 욕심을 없앤 봉사하는 검약정신인 것을 위정자들은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