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무에 갇혀, 한 줄기 소나기가 되어도

▲ 부소암에서 내려다 본 전경.
▲ 부소암에서 내려다 본 전경.

이정표를 따라서 부소암을 찾아간다. 웅장한 암석들이 다양한 이야기를 풀어내고, 길은 능선을 따라 친절하게 흐른다. 작은 헬기장을 만나고 쭉 뻗은 나무 계단을 지나는 동안 마주치는 사람은 없다. 가을 오는 소리로 가득한 숲 속에 오솔길만 홀로 외롭다.

갑자기 하늘이 뚫리고 우뚝 솟은 부소암(扶蘇岩)이 툭 트인 남해를 배경으로 반긴다. 사람의 뇌를 닮은 듯한 거대한 바위는 협곡 건너편에서 하늘과 교신을 하듯 신령스럽다. 중국 진시황의 장자 부소가 유배되어 살았다는 전설과 단군의 셋째 아들 부소가 방황하다 이곳에서 천일기도를 했다는 설이 무색하지 않을 만큼 경이롭다.

신비한 부소암(扶蘇岩)의 품에 안겨 어딘가 부소암(扶蘇庵)이 자리 잡고 있을 거라 생각하니 마음이 급해진다. 바람과 운무가 길을 잃고 비틀대는 철재 다리를 건넌다.침묵에 싸여 있던 바위 협곡 사이로 정체를 알 수 없는 그리움이 밀려든다. 다랭이 논들은 바다를 향해 달려 나가고, 부소암(扶蘇岩)은 하늘을 우러르며, 나는 설렘을 안고 암자를 찾아간다.

문학과 예술, 낭만이 살아 숨 쉬는 남해 바다는 이름만 불러도 마음이 술렁댄다. 서포 김만중이 유배생활을 하며 사씨남정기와 서포만필을 남겼다는 노도와 앵강만의 다숲길이 어디쯤 있는지는 크게 궁금하지 않다. 금산은 쪽빛 바다를 떠나보내지 못하고, 바다는 신령스런 금산을 흠모하며 날마다 시를 읊으며 살아갈 것만 같다.

남해를 유난히 사랑하는 시인과 오래 전 이곳에 온 적이 있다. 그녀는 2월 말쯤의 남해 바닷빛이 가장 아름답다며 함께 가자고 재촉했다. 보름달이 휘영청 뜨는 날이면 남해 바다가 그리워 한달음에 어둠을 뚫고 달려왔다는 무용담을 들으며, 나는 그녀의 시보다 자유로운 영혼과 삶의 적극성을 더 좋아했다. 카리브 해의 샴페인 거품 빛깔 같은 바다를 떠올리며 다가서던 내 앞에, 수줍고 겸손한 남해 바다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게 전부였다.

부소암을 끼고 좁은 오솔길을 돌자 철재 출입문이 열려 있다. 암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보리암로 693번지가 천상이 아님을 확신시킨다. 돌로 만든 성곽처럼 좁고 운치 있는 계단은 여전히 피안의 세계로 향하는 출구 같다. 달리아가 수줍게 피었고 암자는 정숙하기를 요구했지만 나는 탄성을 지르고 말았다. 붉은 양철지붕을 인 작은 암자가 적요하게 누워 있는 바다를 바라보며 수행 중이다.

법당에서 들려오는 회심곡을 들으며 마당 끝에 서서 바다를 바라본다. 퍼렇게 멍이 들도록 부서지고 부서지면 호수처럼 잔잔한 바다가 될 수 있을까. 금산의 든든한 가슴팍에 안겨 온갖 잡념과 근심을 털어낸다. 쪽빛 바다가 아닌들 어떠랴. 흐린 날의 바다와 나 사이에 건널 수 없는 깊은 허공이 있어 좋다.

부소암 현판은 어린 아이처럼 눈빛이 맑은데, 암자는 노쇠한 몸을 지탱하느라 힘겹다. 모든 것은 사라져 간다. 집착은 상처를 낳고 욕심은 또 다른 탐욕을 부른다. 옥돌이라 여기며 집착했던 것들이 어쩌면 푸석돌일 수 있다. 가끔은 좁은 오솔길을 걸어서 신선처럼 살아가는 부소암에 들러 마음을 비우는 것도 좋으리.

스님의 인사에 뒤늦게 석가모니불과 16나한상이 봉안되어 있는 법당에 들어가 절을 한다. 작은 암자가 품고 있는 기운은 참으로 맑고 편안하다. 보물 제 1736호 대방광불 화엄경 진본 권 53이 나온 이곳에 새 건물이 들어선다고 했다. 옆구리가 툭툭 터져 쓰러질 것만 같은 암자를 오래도록 가슴에 담아두고 싶다. 사라져가는 것은 아름다운 법, 머지않아 우리는 새 건물에 또 익숙해져 갈 것이다.

평상에 앉아 스님이 타주신 커피를 마시며 대화를 나눈다. 시종일관 밝은 미소를 잃지 않는 스님과의 대화는 물 흐르듯 거침없고 편안하다. 속세에서 자주 만나온 지인 같다. 오랫동안 수행 생활을 해 오신 선조 스님은, 산중에서 홀로 도를 깨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대중들과 호흡하며 잡념을 없애는 것도 도라고 하신다. 일에 몰두하여 잡념을 없앤다는 스님의 일상이야기가 곧 법문이다. 스님의 화려한 이력보다 소탈하고 평범한 언행 속에 숨어 있을 둔중한 깊이를 찾아내는 것이 내 몫이다.

 

▲ 조낭희 수필가
▲ 조낭희 수필가

갑자기 소나기가 쏟아진다. 우리는 급히 법당으로 몸을 피하고 쏟아지는 빗줄기를 바라본다. 뜰과 마당 위로 거침없이 내리꽂히며 수직으로 죽어가는 소나기의 장렬한 죽음, 순식간에 운무가 시야를 삼키고 법당 앞에 선 단풍나무와 굴참나무만 덩그러니 남았다. 나를 떠받치고 품어주던 대지는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지고 말았다. 누가 남해의 쪽빛바다가 없으면 금산이 없다고 했던가. 나는 운무 가득한 부소암에 갇혀 삶의 어느 부분이 아닌, 나라는 존재 자체를 생각한다.

스피커에서는 금능 스님이 `먼 산`을 노래하고 나는 이성복 시인의 `남해 금산`을 떠올린다. 울면서 돌 속으로 떠나간 그 여자가 되어도 좋고, 남해 푸른 하늘가에 혼자 있는 내가 되어도 좋다. 아니면 금산 부소암에서 잠깐 살다간 소나기가 되어도 좋다. 이곳에서는 인연과 집착에서 놓여나 홀로 서 있는 나를 신뢰할 수 있으니까.

    조낭희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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