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용일<br /><br />문학박사·포항문화원장
▲ 배용일 문학박사·포항문화원장

예로부터 한 나라의 문명사적 진보는 국가와 민족의 지정학적 조건과 역사적 맥락의 재발견에서 비롯되었다. 포항은 오랫동안 역사의 중심에 서지 못하고 변방으로 머물러 있었다. 간혹 향토의 재발견이 있었으나 대부분 정부나 관주도였다. 포항도 시민의 화합, 단합된 향토의 재발견으로 변방을 벗어나야 한다. 한번 변방은 영원한 변방이 아니다. 변방은 변방으로 끝난다는 의식이 영원한 변방을 만들 뿐이다.

그동안 포항은 너무나 오랫동안 중앙집권적 통치에 희생하며 참고 견디는데 익숙해져 있었다. 포항은 고대로부터 신라 수도 경주의 직할 배후지역이 되어 수많은 왜구의 침입을 막던 요충지로서, 해안지역이면서 보기 드문 곡물생산지로서 묵묵히 시대적 과제와 역할을 수행하는데 만족해야만 했다. 포항은 광복 후 늦으나마 포스코의 설립과 이명박 대통령의 배출로 영일만 신화를 이룩하여 한국근대 철강산업의 요람으로서 선진 국가를 꿈꾸면서 국민과 시민들에게 크나큰 자긍심을 심어주었다.

반면에 이러한 인식은 급기야 포항이`천혜의 자연환경, 연오랑세오녀 신화의 고장, 한국해맞이의 성지, 한국 국방의 보루, 한국 해운의 요충지, 어업수산의 중심지`라는 정체성(Brand, 原形質)을 간과하고 시민 스스로 포항의 역사는 짧고 문화는 보잘 것 없는 고장으로 생각케 하였다.

“로마는 하루 아침에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말처럼 오늘의 포항도 하루 아침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포스코 없는 포항은 있었지만 포항 없는 포스코는 있을 수 없다. 비록 포항이 경주나 안동처럼 역사의 후광을 받으며 성장한 것은 아니지만, 포스코가 설립될 때까지 오랜 역사의 시련을 통해 시대적 과제를 극복하며 영일만의 신화를 창조할 수 있는 역사적 조건을 온축해왔다. 다행히 포스코가 설립된 것을 계기로 포항 재발견의 심지가 점화되면서 그 정체성과 풍부한 역사적·지리적·문화적 잠재력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다.

포항의 재발견은 포항의 유무형의 문화유산(자산)과 자연적 문화유산의 잠재력을 재발견하고 포항의 정체성을 정립하여 이를 미래화 세계화하는데 큰 뜻을 둔다. 포항문화의 고유성과 독자성 없이는 애향심도 세계화도 성립하지 않는다.

한편으로 포항문화의 정체성이 타지역의 것보다 우월하다고 믿는 극단적인 근본주의 역시 경계해야 한다. 21세기 문화의 세기를 맞아 문화적 보편주의를 이해하지 못하면 국수주의 문화로 고립되기 때문이다.

포항의 대표적 역사 지리적 특성은 우선 그 역사·문화의 뿌리는 연오랑세오녀 신화로서 포항발전의 원동력은 광명정대의 일월정신(포항정신)이다. 또 포항은 외적 침입이 빈번했던 곳으로 국방의 요충지며 보루다. 신라 때부터 청하 아포(현 월포)에 해군기지, 고려 말 우왕 13년(1387)에 통양포 수군 만호진(현 두호동), 조선 초기에 영일만 내에 영일진(현 오천 해병기지), 장기에 포이포진(현 모포), 흥해에 칠포진이 설치되었다.

그리고 임진왜란부터 한말 의병항쟁에 이르기까지 의병전쟁과 6·25전쟁의 학도의용군 참전은 국가와 향토를 지키는 호국정신과 민족정기의 발로로서 일월정신의 표출이었다. 6·25전쟁시 1952년부터 오천기지(옛 영일진터)에 한국해병대가 주둔하고, 1959년에 해병대1사단이 이곳에 이전 주둔하여 국방의 보루가 되고 있는 것은 포항 정체성의 재발견에서 비롯된 것이다.

포항은 동해안 해운의 중심지로 제민(濟民)의 요람이다. 조선후기 조정은 영조 7년(1731) 북관(함경북도)의 기민을 구제하기 위해 영일현 북면에 포항창진(浦項倉鎭)을 설치하였다. 포항창진은 평소 경주·흥해·영일·청하·장기의 곡물조세 3만석을 보관하는 100칸 크기의 전국적 굴지의 국창으로서 포항동(현 대흥동) 칠성강변의 언덕에 설치되었으며, 소속 공무원 수는 51명, 조선 수는 14척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