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 서울본부장

`비이성(非理性)으로 이성(理性)을 구축한다.` 아주 오래 전 ROTC(학군단) 1년차(3학년) 하계입영훈련 중에 어떤 교관이 한 말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그 시절 입영훈련은 군대문화에 익숙해지지 않은 우리에게 벅찼다. 특히 별 잘못도 아닌 일을 생트집 잡아 불공평하기 짝이 없는 얼차려까지 받는 일은 정신적으로 감당하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육사 출신이었던 그 교관은 이렇게 말했다. “비이성적인 것처럼 보이는 엄정한 군기(軍紀)가 신성한 `국방`이라는 이성을 구축한다.”

한동안 `세월호 참사`에 머물던 국민들의 따가운 눈초리가 `윤 일병 구타사망사건`으로 옮겨갔다. 이번에도 인터넷을 중심으로 전개되는 풍설은 `마녀사냥` `화풀이` `공포 재생산` `음해` `침소봉대` `정치계략`등 못된 양념들을 뒤섞어 고약한 비빔밥을 만들어 돌리고 있다. 이런 추세라면 아마도 이 문제 역시 감성적 분풀이에 집중하다가 제대로 된 원인분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유야무야`의 망각나라로 흘려버릴 지도 모른다는 우려마저 든다.

월남전 참전 이력을 가진 지인 어르신으로부터 모처럼 전화가 왔다. 안부를 여쭙자마자 흥분하여 대뜸 언성을 높여 한참동안 꾸지람하듯 열변을 토하신다. “아이들을 그렇게 길러서 군에 보낸 부모들의 허물, 아이들이 그런 이상한 성품으로 성장할 수밖에 없는 사회문화 환경부터 고쳐야 한다”는 게 그 분 말씀의 요지였다.

`윤 일병 사망사건`의 여파로 세상이 바쁘게 돌아가고 있다. 국회의원들은 연일 군 관계자들을 불러내어 잡도리를 하고 있다. 관련규정 모두 꺼내놓고 어디를 어떻게 칼질하고 덧대야 다시는 이런 고약한 사고가 나지 않을까 노심초사다. 언론 역시 때 만난 듯이 군문 안에서 일어나는 온갖 `반이성`들을 이 잡듯 찾아내어 대서특필을 노린다. 최근의 분위기라면, 대한민국의 군대는 오직 국민적 걱정거리에 불과한 듯하다.

이 사태를 정부의 문제, 부대 지휘관의 문제, 일부 사병들의 문제로만 몰아가려는 일부 정치인들과 시민운동가들의 주장은 작위가 아니라면 명백한 오류다. 나이 스무 살 꽉 차도록 인성이 굳어진 채 군문에 들어오는 아이들에 대해서 부대지휘관들이 제어할 수 있는 여지란 과연 얼마나 있을 것인가. 더욱이, 사고를 일으키거나 유발하는 아이들의 모든 언행을 지배하는 것은 성장환경에 기인하는 정신심리적인 요인들 아니던가.

사랑하는 자식들을 군문에 들여보낸 부모들의 흉흉하고 애달픈 심사를 몰라라 한 채 곪아터진 비정상적 적폐들을 덮고 가자는 게 아니다. 범행을 저지른 사병들을 사형에 처하고, 불상사가 일어난 부대장 목을 비틀자고 주장하는 것은 문제해결을 위한 아주 작은 시작에 불과하다는 이야기다. 온갖 잔혹한 폭력이 난무하는 사이버게임과 피비린내 가득한 조직폭력배 영화의 범람 속에 살면서, 한편으로는 부모들의 과보호 아래 의지박약한 인간군으로 성장하고 있는 아이들을 그냥 두고서 무슨 효과적인 대책을 기대하는가 그 말이다.

국방의무를 신실히 이행할만한 우수 인력자원이 급감하는 가운데, 정치인들은 선심공약으로 복무기간을 자꾸 줄이자하고, 전자장비 등으로 부족한 국방인력을 대체하자니 예산이 없다. 이 치명적인 모순 안에서 당장 모든 문제를 해결할 묘책을 내놓으라고 성마르게 재촉하는 것은 어리석다. 문제의 뿌리를 발본하기 위한 근본적이고 지속가능한 대책이 필요하다. 지금처럼, 너도나도 나서서 마치 유행병처럼 군대를 난타하고 까발리기만 하는 현상은 좋지 않다. 문제는 분명하게 해결하되, 기백에 살고 죽는 군의 사기까지 말살하지는 말아야 한다. 예나 지금이나, 군(軍)은 `비이성으로서 이성을 구축하는` 특수조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