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은 봉

더는 뜻 세우지 못하리 더는 어리석어지지 못하리 더는

천박해지지 못하리 더는 사랑에 빠지지 못하리

더는 술 취해 길바닥에 나뒹굴지 못 하리

더는 비 맞은 초상집 강아지 노릇 못하리

가을이 오면 호박잎 죄 마르는 거지 늙어빠진 알몸 절로 불거지는 거지

담장 위 누런 호박덩어리 따위 되는 거지

그렇게 가부좌 틀고 앉아 유유히 세상 내려다보는 거지

가난한 마음 더욱 가난해지는 거지

가수 최백호의 노래 중에 `쉰이 되면`이라는 노래가 있다. 한생의 중턱을 넘어서는 중년의 힘겨움과 허탈함과 서러움 같은 것이 녹아난 노랫말이 감동적이다. 이 시 또한 그러한 상실과 허망함과 소외감 같은 비감한 정서가 시 전체를 뚫고 흐른다. 열심히 앞만보고 살아온 지난 세월, 돌아보면 해놓은 것 별로 없고 현실의 나는 이 모양으로 나이만 먹었다는 자기 성찰의 정서가 깔려있는 시편이다.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