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재휘 서울본부장

유비는 군사(軍師)인 서서(徐庶)의 제안에 따라 제갈양을 영입하기 위해 두 번이나 찾아가지만 번번이 허탕을 친다. 세 번째로 융중(隆中)의 초가를 찾았을 때 제갈양은 낮잠을 자고 있었다. 유비는 제갈량을 깨우지 않으려고 관우와 장비를 사립문 밖에서 기다리게 하고, 자기만 들어가 초당 댓돌 아래에서 그가 깨어날 때까지 공손히 서 있었다. 유명한 삼고초려(三顧草廬)의 고사(故事)다. 좋은 인재를 맞아들이기 위해서는 정성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6.4지방선거가 끝난 다음 경기도와 제주도 등 몇몇 광역단체에서 낯선 풍경이 펼쳐지고 있다. 남경필 경기도지사 당선자와 원희룡 제주도지사 당선자가 야당에 부분적인 `연정`을 제의했다. 남 당선자는 기존의 정무부지사 자리를 `사회통합부지사`로 이름을 바꾸어 야당이 맡아 달라고 파격 제안했다. 원 당선자 역시 새정치민주연합의 신구범 전 도지사 후보에게 인수위원장직을 제의했다.

안희정 충남도지사는 새누리당 진영의 공약을 도정에 반영할 것을 구체적으로 주문했고, 박원순 서울시장과 정몽준 전 의원은 시정 발전을 위해 서로 협력하기로 약속하는 모습을 연출했다. 성사여부와 상관없이, 정치권은 이런 움직임을 두고 엇갈린 시각을 보이고 있다. 일부에서는 신선한 발상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낸다. 하지만, 대권가도를 향한 `이미지 정치`라거나 `정치적 노림수`가 있는 노회한 술수라며 평가절하하는 시각도 없지 않다.

권영진 대구광역시장 당선자는 한 언론인터뷰에서 이런 움직임에 대해 부정적인 답변을 내놨다. 그는 “연정은 일시적인 쇼 업(show up·나타내기) 측면은 있을지 몰라도 책임정치, 책임행정을 소홀히 할 수 있다. 또 중앙정치의 갈등구조가 그대로 지자체 행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견해를 피력했다. 언필칭 `잠룡`으로 일컬어지는 몇몇 광역단체장 당선자들의 새로운 착상이 해피엔딩으로 이어질 수 있을지는 좀 더 지켜봐야 할 일이다.

문창극 총리 후보자에 대한 갑론을박이 유례없는 혹독한 검증논란으로 치달았다. 교회 안에서 행한 낡은 `기독교 근본주의적 역사인식`에 바탕을 둔 강연내용에 `친일`과 `민족비하` 딱지가 붙으면서 정치적 갈등뿐만 아니라, 종교 갈등으로까지 번지고 있는 양상이다. 새정치민주연합의 융단폭격이 도를 넘었다는 비판이 나오면, 야당은 즉각적으로 과거 김대중·노무현 정부 때 보수정당의 악착같던 발목잡기 역사를 조목조목 들이댄다. 여야 가릴 것 없이 `진영논리`의 수렁에 빠져서 시궁창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진영논리`에 사로잡힌 부류들의 가장 큰 모순은 상대편의 실수는 용서받지 못할 중죄 취급을 하고, 자기편의 하자엔 한없이 관대하다는 점이다. 똑같은 허물을 놓고, 갖가지 궤변으로 이중 잣대를 들이댄다. 우리는 지금 엉뚱하게도 `호오(好惡)`가 `시비(是非)`를 대체하는 위태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옳고 그름`을 가리는 일은 뒷전이고, `좋고 싫음`만을 행동기준으로 삼는 데 점점 더 익숙해지고 있는 것이다.

남경필과 원희룡의 `연정`시도는 일단 성공 가능성이 매우 낮은 정치실험으로 보인다. 그러나 만약 정치시장이 그들의 의도대로 작동되어 모든 가치판단에서 `시비`가 `호오`를 뛰어넘으면서 `승자독식`의 폐해를 불식하기만 한다면, 우리 정치에 엄청난 진화의 싹을 틔울 수 있을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 정치권은 아직도 보-혁의 잣대로 인물을 재단하는 전투적인 흑백의식에 꽁꽁 갇혀 있다. 지금 우리에게 `제갈양` 같은 경천위지(經天緯地)의 인재가 나타난다면 `삼고초려`의 미덕은 과연 소용이 있을까. 온갖 사생활이 들쑤셔지고 그동안 해온 말과 글들이 다 까발려지는 검증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확률은 높지 않다. 그가 제아무리 `제갈공명`이라고 해도 정치권은 예외 없이 보수냐 진보냐를 가려낼 돋보기부터 먼저 들이댈 게 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