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고 차가운` 오현종 지음 민음사 펴냄, 204쪽

때로 어떤 체험은 인생의 지표를 바꾼다. 평범하고 소심한 재수생이었던 `달고 차가운`(민음사)의 주인공 `강지용`은 인생의 낙인이 되어 지워지지 않을 첫사랑의 매력 속으로 깊이 빠져든다. 그러나 순진무구한 첫사랑은 여태껏 자신의 욕망에 대해 단 한 번도 질문해 본 적 없는 무지의 상태에 가깝기에, 이율배반적으로 그토록 무지한 순수는 위험을 초래할 수도 있다. 이 돌이킬 수 없는 체험을 통해 소년은 어느덧 청년이 된다. 순수한 만큼 위험하고 파괴적일 수도 있는 나이, 스무 살의 강지용에게는 과연 어떤 일이 일어난 것일까?

지용이 `민신혜`를 알게 된 순간, 그의 인생은 이제 전혀 다른 곳으로 향해 간다. 예전의 그는 고작 어머니의 잔소리나 권위적인 아버지에게 반감을 가졌을 뿐이며, 그 자신은 살의에 가까울 정도의 반감이라 생각하지만 그마저도 입시를 치른 고교생치고 대단한 정도는 아니었다. 그런 그가 신혜를 만나 자신 안에 있던 추상적 반감을 살의라는 행위로 구체화하기 시작한다. 지용에게 신혜는 생애 처음 만난 `부드러움`이고 `달콤함`이기 때문이다. 아버지나 어머니, 누나, 그 어느 누구도 자신에게 `부드러운` 혹은 `달콤한` 말을 해 준 적이 없으며, 재수생이라는 단일한 호명으로 묶어 버린 세상도 부드럽거나 달콤하지 않긴 매한가지다. 지용은 신혜를 통해 `부드러운`이라는, 그리고 `달콤한`이라는 의미를 비로소 깨닫게 된 것이다.

“신혜에게서 부드러움을 알게 된 순간처럼 지금 이 고통으로부터 영원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았다. 신혜는 달콤한 사과를 건네주고, 내가 그것을 달게 먹고 나자 고통을 알게 하는 사과였다고 속삭인 거다. 하지만 처음부터 알았다 해도 나는 그것을 삼켰겠지. 나는 정말 어린아이였다. 그녀 말대로 아무것도 모르는 바보였다. 그러나, 고통은 실상 사과에서 오는 게 아니라 사과를 건넨 부드러운 손길로부터 온다는 진실만은 알았다.

(……)베개에 등을 대고 기대어 있던 나는 신혜의 머리를 감싸 안고 이불 밑으로 기어들어 갔다. 이불 밑은 그녀의 몸속처럼 부드럽고 안온했다. 나는 껍질을 벗긴 사과 알같이 달고 차가운 입술에 오래 입 맞추었다. 너무 달아서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과즙처럼 다디단 침을 빨아 먹다가, 어두운 이불 속에서 눈을 뜨고 그녀의 얼굴을 더듬었다.”-73쪽

열한 살 어린 나이부터 성매매를 강요당했던 신혜를 가족이라는 지옥에서 구출하기 위해, 지용은 신혜의 엄마를 살해하기에 이른다. 그러나 사랑에 대한 전폭적 신뢰는 배반의 복선이기도 하다. 한 사람이 절대적 세계가 되는 사랑의 맹목은 특수한 사태를 보편으로 오해하는 고집이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재수 학원 옥상이 일탈의 전부였던 지용은 신혜를 만나 살인을 저지른 후 미국과 홍콩 침사추이까지 삶의 영역을 넓힌다.

작가 오현종은 이 소설에서 파괴적 본성이 주인공에게 내재되어 있던 것인지, 아니면 그것이 사랑의 일그러진 방식을 통해 드러난 인물의 또 다른 모습인지 굳이 설명하지 않는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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