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백석이 일제 말기에 러디어드 키플링의 단편소설을 번역한 의미를 논의하는 발표를 한 후 동서울터미널로 갔다. 서둘러 갔는데도 영주행 고속버스는 가까운 시간대 것은 좌석표가 매진이고, 여덟시 넘어서 떠나는 것만 자리가 있었다. 영주는 서울에서 두 시간 반은 걸리는 거리다. 막내 동생이 군대 갈 때 영주 근방에 한 번 가본 적이 있고, 대학 선배인 송명호 선생이 영주 근처에 산장을 마련해서 한 번 가본 적이 있으니 이번이 세번째라고나 할까.

이번 영주길은 문학잡지`문학의 오늘`을 펴내는 은행나무 출판사의 단체 여행에 편집위원들도 함께 참여하게 된 것이다. 무척 피로했던 탓에 까무룩 잠들었다 깨어나니 버스는 벌써 영주로 빠지는 톨게이트를 지난다. 버스에서 내려서는 줄지어 서 있는 택시를 타고 무섬으로 가자고 했다. 밤에 따로 가는 법이 없고, 택시로 들어가는 수 밖에 없다고 했다.

무섬은`물섬`이라는 뜻이라는 데, 땅이름의 연유는 잘 알 수 없다. 밤에 시골 길 쪽으로 빠져 덜컹거리며 외길을 따라 들어가니 밤에도 달이 환하게 떠서 기와집들이 줄줄 늘어서 있는 게 보인다. 다 왔다. 주연선 은행나무 사장과 소설가 심상대씨, 이평재씨, 이명랑씨, 박사랑씨, 신주희씨, 그리고 영주문화연구회의 심득용 회장을 비롯한 영주 문학인들이 백포장을 친 마당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영주문화의 특성이 무엇이냐. 경주는 불교문화요, 안동은 유교문화라면 영주는 유불 통합이라고 했다. 영주에는 부석사가 있다. 부석사는 신라 문무왕 16년인 676년에 한국 화엄종의 종주 의상대사가 창건한 고찰이다. 한국 최초의 유교 사원인 소수서원도 영주에 있다. 1541년에 풍기 군수로 온 주세붕이 백운동서원을 세워 이것이 1550년 이황에 의해 소수서원으로 됐다. 영주시 순흥면에 이 서원이 있다.

소설가 심상대씨는 목하 포털 사이트 네이버에 소설을 연재중인데 아직도`마르시아스 심`시대의 입담을 잃어버리지 않았다.`묵호를 아는가`, `떨림`을 쓴 심 작가는 지금 대중과의 접점을 열심히 모색 중이다. 어찌나 유머 감각이 뛰어난지 좌중에 심상대씨가 없으면 모여서 노는 흥의 80%는 사라져 버린다고 해도 될 정도다.

나는 너무 늦게 당도한 탓에 영주문화연구회 분들과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면서 어언 새벽 세시가 되어서 잠자리를 찾아들었다. 심상대씨와 한 방을 쓰게 됐는데, 한옥 기와집 문간방이다.`문학의 오늘`편집을 맡고 있는 전직 기자 홍성식씨, 윤후명 전집 편집을 맡게 된 소설가 지망생 강건모씨와 밤인사를 나누고 잠자리에 들었다.

맙소사. 아침 일곱시 반부터 일찍 일어나야 부석사도 보고 소백산 12자락길 산책도 한다고 깨우고들 야단이다. 문인들이 모이면 아침에는 느지막이 아홉시쯤 일어나 아침밥을 먹는둥 마는둥 담소나 나누다 서울로 올라오면 되려니 했는데, 그게 아니다.

영주 문화를 소개해 주겠다는 영주 분들의 의향이 작용해서 아침을 제주산 복어집에 가서 먹고 부석사로 가서 이 오래된 고찰에 얽힌 이야기들을 듣고, 소백산`자락길`의 맨 마지막 길에 해당하는 12자락 길을 걸어보기 위해 좌석리로 갔다. 좌석리에 내려서부터는 걸었다. 제주도 올레길이나 지리산 둘레길처럼 소백산을 열두 자락길로 옛 길을 다 살려놓았다는 설명을 들으면서 산길을 걸었다.

걸으면서 영주 무섬 마을의 아침을 생각했다. 일어나서 보니 마을에 옛 삶의 향기가 가득하다. 어느 곳보다 한옥들이 잘 보존되어 있고, 어느 집 마당 앞에 흰 작약이 피어 있었다. 이렇게 운치 있는 마을도 보기 힘들 것이라는 생각과 함께 영주 여행의 맛을 다시 한 번 실감한 하루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