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이광수 장편소설`무정`이 한국에서 근대문학의 중요한 버팀목이 됐다는 건 다들 아는 사실이다. 나는 몇 년 전부터 이 소설을 새롭게 보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국문학 연구자로서 내가 가진 가장 큰 불만은 도대체가 이 소설의 새로운 점이 어디에 있는가를 사람들은 잘 알지 못하는 것 같다는 것이었다.

이 소설에는 잘 알려진 대목이 하나 있다. 이 소설 남자 주인공은 `형식`이라는 경성학교 영어 선생인데, 자기가 가정교사로 있던 김장로 집 딸 `선형`이를 데리고 유학길에 오른다. 그런데 이 기차에는 어렸을 적 `형식`의 정혼녀였던 `영채`가 병욱이라는 여성과 함께 동행하고 있다. 배학감에게 정조를 유린당할 뻔한 죄책감에 `형식`의 곁을 떠나 평양으로 죽으러 갔다 이 여성에게 설득되어 새로운 공부를 하러 유학을 떠난 참이다.

일행은 경부선 기차가 삼랑진에 다다랐을 때 수해를 만나게 되고, 수재민들을 돕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한다. 겨우 사태가 진정되었을 때 세 사람의 여성 앞에서 `형식`은 배워야 한다는 것을 역설한다. 이 말에 세 여성은 마치 어미 새가 모이를 가져다 주기를 기다렸다 다투어 작은 입을 내미는 것처럼 화답한다. 교육과 실행으로 조선을 바꿔 놔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 장면 때문에`무정`은 외국 유학과 신교육을 통해서 조선을 바꾸어 놓자고 주장한 소설로 평가돼왔다. 그것이 `무정`연구사의 대체적인 해석 방향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이인직의`혈의누`가 이미 말해놓은 것이 아니던가. 그곳에서도 청일전쟁 평양성 싸움의 와중에서 부모와 헤어지게 된 옥련이가 우여곡절 끝에 미국 유학을 떠나 공부하고 돌아오지 않던가.

나는`무정`의 새로움은 유학과 신교육 사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과 운명 앞에서 고뇌하는 `형식`의 내면 세계를 깊이있게 드러낸 것이라고 보았다. 그것이 이 소설을 명실상부한 근대소설로 만들어 주었다고 본 것이다.

앞에서 말한 기찻간 장면에서 형식은 영채가 한 기차에 탄 것을 알고 생각한다. 선형과 영채를 사이에 두고 번민하던 형식은 자신이 사랑도 모르고 현실도 알지 못하는 어린애라고 생각한다. 이 장면을 곱씹으면서 나는 문득 칸트의 짧은 글`계몽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을 떠올렸다. 형식이 말하는 어린애란 칸트가 그 글에서 말한 미성년이 아니더냐. 칸트는 말했다. “계몽이란 우리가 마땅히 스스로 책임져야 할 미성년 상태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미성년 상태란 무엇이냐. 그것은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는 자신의 지성을 사용할 수 없는 상태”다. 그러면 미성년 상태를 왜 스스로 책임져야 하느냐. 그것은 미성년 상태의 원인이 지성의 결핍에 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지도 없이도 지성을 사용할 수 있는 결단과 용기를 가지지 못한 데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계몽이란 무엇이냐. 그것은 자신의 지성을 스스로 발휘해 진리와 빛을 찾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자기를 알아가는 능동적 과정이며, 자기의식을 획득하는 과정이다. 또 그런 의미에서 계몽이란 선생이 학생을, 제국이 식민지를, 어른이 아이를 가르치는 일방향적, 하향식 주입이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알아야 할 것을 터득하는 과정을 의미한다.

자, 이렇게 보면`무정`에서 형식은 왜 유학을 가는가? 그것은 서구나 일본 같은 남한테 배우러 가는 게 아니다. 아니, 그들에게 배우기는 하지만 그것은 그들이 가진 것을 넙죽넙죽 받아먹으려는 게 아니라, 스스로 생각해서 터득하기 위한 것이며, 자기에 대한 자각을 얻기 위해서다.

나는 그저께 이 문제를 가지고 논문을 하나 완성했다. 국문학 공부하는 한 사람으로서`무정`같은 작품에 대해 새로운 관점을 수립하고 있을지 모른다는 기쁨이 결코 작을 수 없는 일요일 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