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방민호 서울대 국문과 교수

며칠 전에 나는 선배와 함께 어떤 회의를 하기 위해 대전에 갔다. 대전은 내 고향이지만, 그 날은 이 선배가 대전에 있는 대학에 재직하고 있기에 그곳에서 회의를 하기 위해 간 것이었다. 그날 회의 시간이 바뀐 이유도 있지만 밤새 회의 준비를 해 놓은 것을 깜박 잊고 나오는 바람에 집으로 되돌아갔다가 서울역으로 가느라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늦었다. 이 시간이 내게는 왜 그렇게 힘들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그 선배가 늦은 나를 보고 크게 꾸짖을 것 같지 않은 분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배는 나와 어떤 자리를 놓고 경쟁해야 하는 위치에 있었고, 그 후 십 년 가까운 세월이 흘렀다. 그 시간은 사람이 사람을 이해하는데 충분한 시간일 수도 있다. 그러나 또 어떤 사람에게는 그 시간이 결코 짧지 않는 시간이 되기도 한다. 이 선배와 나는 지금도 그렇게 가깝다고만은 할 수 없다. 그러나 그 동안 우리는 어쩌면 그 이전에 비해 훨씬 더 가까운 사이가 됐다고 봐도 좋을 것 같다.

나는 마음이 급한 나머지 KTX 안에서도 숨을 헐떡이는 듯한 기분이었다. 겨우 대전역에 당도해서 뛰듯이 택시를 타고 선배가 계신 대학교로 갔다. 그곳은 역에서 20분 정도 걸리는 곳에 있었다. 선배는 택시를 타고 내린 내 전화를 받고 회의실이 준비돼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해 주었다. 늦은 것에 대해서는 어떤 말도 없었다.

추운 회의실 같은 곳에서 회의를 하다 보니 어느새 난방이 들어왔는지 실내가 따뜻해졌다. 나는 회의 준비도 충분히 하지 못한 것 같았는데, 선배의 가르침대로 문제를 만들고 고치고 하다 보니 뜻밖에 수월하게 일이 풀리는 것 같았다.

회의 시간도 길었지만 저녁식사 시간은 더 길었다. 나는 선배의 안내로 대학에서 그리 멀지 않은 포항 물회집으로 갔다. 포항 물회집은 포항에 있는 곳이라야 제맛을 낼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나 그곳 포항 물회집은 결코 나쁘지 않았다. 선배는 물회가 맛을 제대로 내려면 무 대신에 배를 썰어 넣어야 한다고 했다. 그 집은 선배가 미리 칭찬한 대로 맛집 중 맛집이었다. 물회에 충청도 대전 소주`린`을 맛나게 걸치고는 물곰탕을 더 시켜 먹었다. 물곰탕도 동해안 속초나 포항 같은 곳이라야 맛이 좋은 법인데, 이 집은 물곰탕 끓이는 솜씨도 만만치 않았다.

어느새 소주가 세 병. 조금 있으니 대전의 다른 대학에 다니는 후배가 합류했다. 이 후배와 나는 최근에 서로 편치 않은 문제를 처리해야 하는 상황에 처해 있었으나, 내게 아무런 불편한 내색도 보이지 않았다. 내 고향 친구까지 포함해 일행은 넷이 됐다. 네 사람은 당구를 치러 갔다. 진 팀이 당구비도 내고, 2차 술값도 내기로 했다. 나와 고향 친구가 한 팀이 되고, 나의 선배와 후배가 다른 한 팀이 되었다. 우리 팀은 400을 놓고, 저쪽 팀은 350을 놓았다. 이 점수는 당구를 쳐 본 사람이어야 어떤 점수인지 안다. 누가 이겼을까. 물론 우리 팀이 이겼다. 왜냐. 내 고향 친구는 나와 당구를 쳐서 한 번도 `물려`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당구가 `짠` 인물이기 때문이다. 저쪽 팀에서 당구비를 냈지만, 처음 약속과 달리 2차 술값은 내가 냈다. 선배의 마음이 내내 고마웠던 때문이라고나 할까.

사람은 살아가면서 서로 대립적인 위치에 서게 되는 경우가 많다. 나는 지금껏 그와 같은 상황에 직면해야 할 때가 많았다. 어느 때는 같은 시험을 보면서 누구는 떨어지고 누구는 붙어야 하는 경쟁을 해야 했다. 어느 때는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두 사람, 또는 세 사람이 운명적인 위치에 함께 서 있어야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런 악연을 악연 그대로 남겨두지 않고 새로운 관계로 만들어갈 수 있는 것은 결국 사람의 마음이다. 나는 그날을 함께 보낸 선배가 그렇게 고마울 수 없었다. 내가 그분을 이해하려고 하는 만큼 그 분 또한 나를 내내 이해해 주려고 노력해 왔음을 분명히 깨달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