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분간 인간` 창비 펴냄 서유미 지음, 244쪽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과 창비장편소설상을 받은 서유미(37)의 소설집 `당분간 인간`(창비)이 출간됐다.

서유미는 그간 세편의 장편소설을 통해 동시대 인간 군상의 꿈과 욕망, 일상의 풍경을 솔직하고 날렵하게, 때로는 강렬하게 그려내왔다. 그런 한편으로 지금껏 꾸준하고 성실하게 발표해온 단편들은 작가가 다양한 모색과 변화를 통해 그와는 또다른 매력을 지닌 나름의 세계를 구축하는 데 성공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의 소설은 우선 기발한 상상력과 독특한 설정으로 눈길을 끈다. `스노우맨`은 폭설을 뚫고 출근을 하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이야기이다.

기록적인 폭설로 온 도시가 파묻혀 집 안에 꼼짝없이 갇힌 재난 상황에서도 남자는 직장에서 뒤처질 것 같은 불안에 떠밀려 출근을 감행한다. 홀로 삽 한 자루를 들고 갖은 애를 쓰며 앞으로 나아가보지만 출근길은 여전히 멀고, 부장은 태연하게 출근을 재촉한다. 남자는 자신의 무능력함을 자책하며 다만 막막한 삽질을 계속한다.

`저건 사람도 아니다`에서 홀로 아이를 키우며 직장생활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친 여자는 비밀리에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로봇 도우미`의 힘을 빌리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숨통이 트이는 것도 잠시, 완벽한 능력을 지닌 로봇 도우미에게 밀려 어느새 직장과 가정 모두에서 자신의 자리를 잃어버리고 로봇 뒤에 자신의 모습을 감추어야 하는 처지가 된다.

`삽의 이력`의 남자는 도시개발의 기초작업이라는 명분으로 무작정 공터에서 구덩이를 파는 업무를 맡게 되는데, 구덩이를 파는 족족 다음날이면 말끔히 메워져 있는 것을 발견한다. 또다른 남자 역시 똑같은 이유로 무작정 구덩이를 메우는 업무를 맡고 있었던 것. 하지만 두 남자 모두 각자의 생활을 꾸려가기 위해 무의미한 `삽질`을 멈출 수 없는 부조리한 상황이 계속된다.

일과 육아에 치여 자기 자신을 잃어가고 출근이란 재앙을 헤치고 살아남는 일과 다를 바 없으며 생활을 위해 하루하루 반복해야 하는 일은 실은 아무런 의미 없는 삽질과도 같다. 그러니 이 모든 것에 지쳐 온몸이 한없이 물렁해져 퍼져버리거나 굳어서 산산이 부스러진다 해도 그다지 이상할 것도 없다. 그처럼 우리는 모두 인간이지만 `당분간`만 겨우 `인간`으로 버텨내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사방이 완강하게 막힌 이곳에서도 가냘프나마 따뜻한 온기가 존재한다. `그곳의 단잠`에서 고층아파트에 사는 K는 고소공포증 때문에, 반지하방에 사는 L은 폐소공포증 때문에 똑같이 날마다 잠을 이루지 못한다. 서로 형편과 처지가 같지 않지만, 우연히 만난 K와 L은 어느새 서로 가까워지고, 서로의 방을 번갈아 찾으면서 오랜만의 단잠을 누리는 단짝이 된다. 이처럼 팍팍한 생활 속에서 다르면서도 같은 처지에 놓인 이들이 주고받는 작은 호의가 얼마나 소중한지 보여주는 것이 서유미의 소설이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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