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자 천정서 우연히 찾은 궤 한짝엔
130여년 만에 빛보게 된 유산들이…
고문서, 유물 등 덕동민속전시관 만드는데 큰 도움

정월 대보름날, 대동회를 소집한 사람들은 수초군(首草軍)을 선발했다. 수초군은 마을의 규범을 관할하는 사람으로 특히 농사와 관련된 행위 전체를 이끌었고 임기는 1년 이었다. 수초군의 자격에는 신망 있는 사람, 자신의 이익 보다는 공동의 이익을 먼저 생각하는 심성이 우선이었다. 수초군으로 선정되면 노임을 세세하게 책정했다. 논매는데 얼마, 밭매는데 얼마, 남자와 여자, 또 중노동과 경노동에도 차이를 두었다. 사람의 노동력에 대한 대가만을 책정하는 것이 아니었다. 방목하는 소가 곡식에 피해를 주었을 경우에도 벌금을 매겼으며 녹비채취에 대해서도 결정하였다. 이것을 영(命)친다고 했는데 몇 월 며칠 어디서 어디까지라는 구역을 정했다. 수초군 아래 숫총각을 한 명 두었다. 숫총각은 수초군의 지시를 전하거나 벌금 받으러 가는 것 등 잔심부름을 했다. 그렇게 수초군의 지휘 아래 덕동의 한 해 농사가 시작되었다.

양력 8월15일 무렵, 오곡백과가 무르익고 조석으로 초가을 바람이 선선하게 불어오면 수초군의 주재 아래 서래치 행사가 열렸다. 서래치는 세서연(洗鋤宴)으로 `호미씻이` 즉 농사를 마치는 날이란 뜻이다. 그 해 어느 집 농사가 제일 잘 되었나를 가늠하는 품평회에는 주로 머슴들이 주인공이었으며 장원을 뽑아 노고를 칭송했다. 농사의 등급이 조정되면 주인댁에 저마다 음식을 분담시켰다. 상(上) 농가는 떡, 중(中) 농가는 술, 하(下) 농가는 감주나, 안주 등을 명하면 흔쾌히 수락하고 장만했다. 수초군은 당일 모인 음식 또한 정성이 깃든 순으로 1, 2, 3등을 평가한 후 사례를 했는데 현금이 아니라 수건이나 담배 등으로 정을 표시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음식을 나눠 먹으며 축제 같은 하루를 보냈다. 정성껏 함께 잘 살자고 의욕을 돋우고 권장하는 목적이었다. 존재감과 연대감의 확인과 더불어 삶의 평안을 기원했던 시절이었다.

머슴을 위주로 행해졌던 것이 세서연(洗鋤宴)이었다면 양반들은 종경도 놀이를 즐겼다. 종정도(從政圖), 승경도(陞卿圖)라고도 불리는 이것은 `관직도표`로서 말판에 정1품에서 종9품에 이르는 문무백관의 관직명을 차례로 적어 놓고 윷가치나 윤목(輪木)을 던져 나온 숫자에 따라 말을 놓아 하위직부터 차례로 승진하여 고위 관직에 먼저 오르는 사람이 이기는 놀이이다. 조선시대 양반의 자제나 부녀자들이 남편 또는 자식의 입신출세를 소망하여 연초에 관운을 점치고 승진을 기원하기 위해 널리 행해졌다. 조선시대의 관직은 등급이 많고 칭호와 상호관계가 복잡하여 체계화된 개념을 갖기가 어려웠는데, 이 놀이를 통해 자연스레 관직제도를 익힐 수 있었다. 또한 벼슬을 썼다가도 귀향을 가고 사약을 받고 또 다시 관직에 오르는 등 생의 희로애락을 느껴보는 의미도 컸다.

누렇게 바랜 종경도를 펼쳐 바라보는 이동진(81세)씨, 그는 양동마을에서 태어나 아버지의 고향인 덕동으로 30세 때 들어왔다. 당시만 해도 집집마다 고서들이 가득했다. 제일 큰 집인 사우당에는 책방이 별도로 있을 정도였다. 상자 가득 고서적을 포개 놓은 모습이 생생하다. 선조들의 흔적을 귀히 여기고 잘 보관하여야 한다는 마음은 있었으나 사는 일에 바빠 미적거리는 사이에 하나 둘 사라진 책들, 그 안에 담긴 무수한 이야기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러나 그의 나이 쉰이 넘어서면서 농기구부터 생활가구까지 옛 물건들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마을 사람들은 선조들이 남긴 유산들을 모아 보존하자는 의견에 흔쾌히 동참했고 남아있던 것들을 기증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사다리를 놓고 올라간 정자의 천정에서 궤를 하나 발견했다. 그 안에서 나온 보자기를 풀어 보는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무릎을 꿇고 절을 했다. 눈물이 났다. 수백 년 만에 전해진 조상의 선물은 그야말로 타임캡슐이었다. 공서와 세덕사에 대한 명문을 비롯하여 토지 매매 관계, 마을을 방문한 사람들의 본관은 물론이고 함께 온 노비와 말의 수량, 심지어 식사를 하였는지 잠을 자고 갔는지 까지도 세세히 기록한 천배록(薦拜錄), 삼베에 쪽물을 들인 세덕사 향사 예복과 제복, 한지를 일일이 꼬아서 만든 바랑과 옥수수 등 긁개 까지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간절한 바람이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130여 년 만에 세상에 나온 물건들은 많은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숙종 정묘년에 처음 공사를 시작해 실로 3대에 거쳐서야 완성한 `사의당(四宜堂)`. 훗날 사의당 본체를 세덕사의 문루로 바치고 `우리 가문 학문의 연원`이라는 뜻의 `연연루(淵淵樓)`라 이름을 바꾸었다. 그 후 1871년 전국에 불어 닥친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인해 연연루는 세덕사와 함께 훼철 위기에 놓이고 말았다. 이에 사림(士林)들은 연연루를 지키기 위해 의논에 들어갔다. 그 결과 연연루는 본래 세덕사의 건축물이 아니었는데 일이 이 지경에 이르렀으므로 다시 본래의 사의당으로 되돌릴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온 동민들이 동원되어 하룻밤 사이에 담을 쌓았다. 서원과 독립된 건물로 구분하고 사의당과 용계정의 옛 현판을 달아서 훼철되는 화로부터 보호하려 했던 것이다.

주변의 물건들을 보자기에 담아 깊숙이 보관하여 후대에 전한 선조들의 지혜는 경상북도 문화재 자료 제 552호로 지정된 포항 덕동 여주 이씨 문중 소장 고문서 67점을 비롯해 목판과 천배록, 호적단자 등 다양한 유물과 유고를 전시한 덕동민속전시관을 만드는데 큰 역할을 했다. 사우정 고택과 애은당 고택, 이원돌 가옥 등 여전히 고건축물의 아름다움을 자랑하는 마을 덕동, 세월이 흘러 정월 대보름에 열리던 동제도 여름철에 약식으로 행해지고 수많은 세시 풍습 또한 사라지고 있다. 그러나 2011년 4월10일 덕동 사람들은 `화수회`에서 `보존회`로 이름을 개명하고 숨어있는 전통과 자연의 매력을 전하고자 새로운 행보를 시작했다. 수백 년 숨결을 간직한 덕동의 삼기(三奇)와 구곡(九曲)의 물소리 그리고 팔경(八景)의 자태가 들려 줄 이야기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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