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내게서 사라졌다

아무리 문 열어 놓고 기다려도

내게로 돌아오는 내 기척

발소리 들리지 않는다

화사한 햇살 하루 종일 퍼부어도

그늘인 나는

텅 비어 있다

거울을 닦고 또 닦아보아도

보이는 것은 빈 껍질

허물 뿐이다

날마다 뜨거운 생의 입김

힘차게 불어보아도

내 뺨에 와 닿는 건

내가 내게서 사라졌다는 차가운 상징

하염없이 문 열어놓고

내가 돌아오길 기다리는 나

두 눈보다 먼저 온몸이 울고 있는 나

`슬픔도 진화한다`(2002)

텅 비어버린 자아, 상실되어버린 자신을 바라보는 시인의 시선이 우울하기 짝이 없다.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우리 현대인의 자화상 같은 작품이다. 세상은 우리를 가만 놔두질 않는다. 굴절되고 왜곡된 현실의 여러 조건들과 상황들이 우리의 실존적 가치를 무너뜨리고 가상의 나로 가면을 쓴 나로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라고 하면 지나친 말일까. 내 존재의 참 모습을 찾아가고자 하는 욕망이 우리의 내면에 항상 꿈틀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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