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긋불긋 잘 익은 계절, 그 이파리들이 바람에 흩날린다. 드높이 푸르던 하늘이 낮아지고 하늘 바탕을 수놓던 구름의 수채화도 슬그머니 사라졌다. 수시로 보았던 산은 붉게, 노랑으로 채색한 것들을 마지막 빛깔을 내려놓는다.11월의 마지막 날, 영천시 자천면 오리장림을 걷는다. 산책로가 자그마한 숲길이다. 입구에는 수령이 백 오십 년이 지난 나무들이 줄지어 서 있다. 숲이 있어 홍수로부터 안전할 수 있었고, 대책 없이 불어오는 강한 바람에도 숲이 있어 견딜 수 있었다. 숲은 자천리 일대 좌우 오리에 걸쳐 뻗어 있다고 해서 오리장림(五里長
나무와 친해지는 나만의 방법이 있다. 우선 나무의 이름을 알아보고 이름을 불러준다. 다음은 수시로 나무 아래 어슬렁거린다. 나무 아래 의자가 있다면 좋고 그렇지 않다면 퍼질러 앉아도 무방하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있으면 나무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다. 이제는 나무의 몸피를 살핀다. 안아보고 만져보며 나무의 시간을 읽어낸다.생태공원 오솔길을 걸으면 나무를 많이 만난다. 나무의 생김이나 모양을 보고는 이름을 정확하게 알지 못했다. 잘 가꿔진 공원에는 친절하게 나무에 이름표를 달아놓았다. 너의 이름이 뭐니? 궁금해서 나무 가까이 가서 이름
겨울로 가는 길목, 수목원은 만산홍엽(滿山紅葉)이다. 찬바람이 이 골짝에서 저 골짝으로 불자 나무들이 서둘러 다른 색깔로 잎을 물들인다. 사람도 울긋불긋한 옷을 입고 수목원을 찾는다. 이들의 왁자한 소음을 잘 버무리면 푸짐한 가을 한 상이다.붉은 꽃등이 내준 길을 따라 걷는다. 바람 한 자락에 나뭇잎이 화르르 떨어진다. 단풍나무가 잎을 떨어뜨려 푹신한 융단을 깔아 놓았다. 단풍의 해사한 빛에 이끌려 나무 아래 머문다. 나무가 뿜어내는 붉고 고운 열정이 고스란히 느껴진다. 나뭇잎 하나, 둘 주워 손바닥에 살포시 올린다. 군데군데 벌레
누구나 한 번쯤 열정을 불태우고 싶을 때가 있다. 붉게 타오르는 마음을 일으켜 무엇을, 모든 것을, 더 많은 것을 이루려 두 주먹 꽉 잡는다. 마음과 달리 팍팍한 오늘 하루를 살다 심장의 박동이 느려지고 현실과 자주 타협한다. 뜨겁던 마음이 재처럼 사그라질 때, 배롱나무를 보라고 말하고 싶다.배롱나무를 쓰다듬으면 가지가 흔들리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배롱나무를 만지면 간지럼을 타듯 흔들린다고 해서 붙여진 별명이다. 나무의 수피는 상처가 났다가 아물어 딱지가 떨어진 것으로 보인다. 수피를 찬찬히 들여다보면 생각과 다르게 나무는 매끈하
하늘 높이 양떼구름이 몽글몽글하다. 산들바람이 양떼구름을 물리고 그 자리에 새털구름을 엎는다. 가을하늘이 그린 수채화 아래 플라타너스도 높다랗게 이파리를 달고 서 있다. 기억 속의 한 풍경이다. 플라타너스 이파리를 타고 희미한 흑백사진 속으로 떠난다.초등학교 때, 플라타너스는 약속장소였다. 수업을 마치고 운동장을 가로질러 플라타너스 아래 모였다. 십리 길을 혼자 가면 심심해서 친구들과 몰려다녔다. 나무 아래 친구의 가방이 하나둘 던져졌다. 가방 서너 개가 쌓이면 우리는 비석치기를 하고 그림자밟기 놀이를 했다.매번 늦게 오는 친구가
갓길 한적한 곳에 무인계산대가 있다. 걸음을 멈추고 다가가 보았다. 거기에는 서너 봉지의 밤이 새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 ‘한 봉지에 만원입니다.’라는 명찰을 달고. 밤이 든 봉지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하다 그냥 내려놓았다. 주머니를 뒤져보니 현금이 없다. 무인계산대가 있는 뒷산에는 골짜기마다 밤나무가 있을 것이다.해마다 이맘때면, 작은 배낭에 얼음물 하나 챙기고 뒷산에 올랐다. 밤나무 아래는 입을 벌린 밤송이가 수북이 떨어져 있다. 나무에는 가시 달린 밤송이가 알밤을 금방이라도 떨어뜨릴 듯 입 벌렸고, 아직은 아니라고 가지에
하늘 구름 몇 점 지상을 내려다보며 떠간다. 잠자리가 투명한 날개를 휘저으며 한낮을 유영한다. 잘 가꾼 들판에 바람이 벼들을 쓰다듬고, 노릇노릇 알곡이 익어간다. 세간리 은행나무에도 때맞춰 가을바람이 머문다.아름드리 은행나무는 몇 아름이나 될까, 홍의장군 곽재우 생가의 은행나무는 두 팔을 벌려도 다 안아 볼 수도 없다. 600년 살아있는 혼을 느꼈다는 것만으로 왜소했던 내 품이 넉넉해지는 것 같다. 잠시 너른 품에 안겨 살포시 눈을 감는다.은행나무를 ‘살아 있는 화석’이라 부른다. 나이가 수백 년에서 천 년이 넘는 고목이 많다. 그
옛날 아주 먼 옛날, 신라 시대 현곡면 오류리에 열일곱, 열아홉 자매가 살았습니다. 청등·홍등이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자매였습니다. 자매는 마음씨도 고와서 온 마을에 칭찬이 자자했습니다.옆집에 씩씩한 청년이 살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자매는 전쟁터로 떠나는 청년을 담장 너머로 훔쳐보았습니다. 언니는 장독 뒤에 숨어서, 동생은 담 밑에 숨어 흐느껴 울었습니다. 그러다가 서로 눈이 마주쳤습니다. 자매 둘 다 청년을 짝사랑하고 있었습니다.얼마 뒤, 청년이 전쟁터에서 죽었다는 소식이 날아왔습니다. 자매는 너무나 슬퍼 ‘용림’이라는 연못으
아낌없이 주는 나무가 있다. 살아있는 동안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내준다. 그러면서 조금도 으스대지 않고 조용하다. 어느 집에서나 있는 나무라 있는지 없는지조차 느껴지지 않는다. 무언가가 하나 빠졌다는 허전함은 베어지거나 죽은 뒤에 문득 떠오른다. 아, 그 집 뒤란에 감나무가 있었지.감꽃은 늦봄에 노랗게 핀다. 봄의 꽃들이 피고 지기를 할 때 감꽃은 조금 늦게 이어달리기에 참여한다. 감꽃은 나무의 커다란 잎에 묻혀 있어 잘 살펴야 초록을 품고 있는 꽃을 볼 수 있다. 커다란 잎에 숨어 수줍은 듯 삐죽이 고개를 내밀다가 금방 떨어진다
산들 어디에나 초록이 짙다. 여름이 깊디깊었다는 말이다. 꽃자리 다투며 피는 봄꽃이 한바탕 지나가면 여름꽃이 하나둘 피기 시작한다. 나무 위에서 매미 울음소리 울창한 여름날, 담장 위로 바깥을 내다보는 꽃이 있다. 능소화다.능소화는 담쟁이 넝쿨처럼 덩굴식물이다. 빨판이 나와 어디든, 무엇이든 가리지 않고 달라붙는다. 주로 시골의 돌담에 피어 고즈넉함을, 도시의 시멘트 담에 올라 따스함을, 붉은 벽돌담까지 친근하고 익숙하게 기어오른다. 그리고는 담장에 올라 치렁치렁 꽃줄기를 간드러지게 늘어트린다.꽃의 색깔이 붉지도 노랗지도 않아 ‘붉
여름은 모감주나무의 계절이다. 며칠 동안 비가 오락가락하며 애간장을 태우더니 오늘 하늘은 참 맑다. 이때다 싶어 서둘러 길을 나서기로 한다. 등굽잇길에 들자 아직 빠져나가지 못한 습한 것들이 열어 둔 창문으로 들이친다. 같이 비집고 들어온 풀 냄새도 바쁘게 내 마음 언저리에 걸터앉는다.모감주나무를 만나러 가는 길은 아름답다. 임곡 항에서 925번 해안도로를 따라 운전하면 드라이브 코스로도 멋지다. 왼쪽은 바다요, 오른쪽은 산으로 둘러싸여 길목마다 다른 풍경을 만들어 준다. 비릿한 바다 냄새가 코끝을 찌푸리게 해도 눈앞에 보이는 풍경
고향마을 입구에 느티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느티나무 아래는 시원하고 그늘이 많아 사람들이 자주 모였다. 농사일이 바빠도 틈틈이 모여 담소를 나누는 어머니들만의 사랑방이었다. 그늘 따라 놓인 평상에는 다양한 먹거리가 있었다. 구수하고 달달한 삶은 옥수수, 하얀 분이 나고 김이 모락모락 나는 감자는 아이들을 나무 아래로 불러들였다.느티나무는 적게는 수백 년, 많게는 천 년을 산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느티나무는 부산시 기장군 장안읍에 있다. 수령이 천 년이 넘었다고 하는데 그 시간을 어찌 견디며 살아내고 있을까. 궁금해 길을 나
책장을 넘기다 산비탈 바위틈에 있는 노간주나무를 보았다. 나무가 도저히 자라지 못할 곳에 뿌리를 내리고 비스듬히 서 있었다. 더구나 물이라고는 전혀 없는 곳이었다. 하늘이 내려 주는 빗물만으로 지탱하며 사시사철 푸름을 지키고 있었다. 그 당당한 모습에 자꾸 마음이 갔다.때마침, 봄장마가 물러가고 말간 하늘이 얼굴을 내밀었다. 무작정 나무를 찾아 떠났다. 초록이 연두를 품고, 진분홍이 연분홍의 꽃들을 모두 삼켰다. 하늘과 산이 맞닿아 초록이 머무는 곳, 햇살과 바람, 구름이 쉬어가는 곳, 경상북도 수목원으로 향했다.수목원에는 나무와
소나무는 꿋꿋하다. 모양새가 참으로 아름답고 사철 푸른빛을 잃지 않아 초목의 군자로 부른다. 우리 땅과 우리 삶에 잘 적응한 나무이다. 그래서 애국가에서 민족의 푸른 생명력을 소나무에 비유했다.‘남산 위에 저 소나무 철갑을 두른 듯 바람서리 불변함은 우리 기상일세’소나무의 생동력은 줄기에서 뻗는 모양을 보면 알 수 있다. 용트림하며 구불구불 올라가는 줄기의 형상은 마치 용이 하늘로 오르는 모양새다. 품새 또한 침엽수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어디 심어 놓아도 품격 있게 보인다.소나무 중의 으뜸은 금강송이다. 줄기는 붉으며 가지가 넓지
마음을 내고 때를 잘 맞춰야 볼 수 있는 나무가 있다. 다름 아닌 때죽나무다. 헛걸음 한 번 한 뒤 다시 날을 잡아 포항시 흥해읍 도음산으로 향했다. 한참 오르고야 개울가 중턱에 자리 잡은 때죽나무꽃을 만날 수 있었다.때죽나무는 특이하게 꽃이 아래를 향해 핀다. 종처럼 생긴 하얀 꽃이 일제히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다. 다섯 개의 꽃잎을 살포시 펼치면 그 가운데에 노란 수술 열 개가 옹기종기 모여 있다. 때죽나무꽃은 띄엄띄엄 감질나지 않게 한 무더기씩 모여 핀다. 마치 소곤소곤 재잘대는 오월의 해맑은 소녀들 같다. 열흘 남짓한 짧은 꽃
순백의 꽃들이 깊어가는 오월이다. 노랑, 분홍의 꽃들이 자리를 내주자 조팝나무, 이팝나무의 꽃들이 하얗게 핀다. 저만큼 나지막한 산등성이도 아까시꽃으로 하얗게 물들고 있다. 바람에 실려 온 아까시 향기가 코끝을 스친다. 향기를 따라가면 유년의 봄날에 닿고 그 고샅길에 어린 내가 있다.아까시 나뭇잎을 들고 친구들과 가위바위보를 하며 놀았다. 개구쟁이들의 놀이에는 우리만의 이야기가 빠지지 않았다. 서로의 마음을 알아 가는 이야기였다. 오늘은 좋아하는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없다’, 옆집 숙이는 지금 놀러 나올 수 ‘있다’, ‘없다
하늘이 참 맑은 날, 바람 한 자락에 꽃 소식이 묻어왔다. 먼저 나서는 마음 따라 자두나무 과수원으로 향했다. 밭둑에는 쑥, 냉이, 민들레꽃이 나붓이 엎드려 있고 나무들은 하늘 아래 햇볕 바라기 중이다. 어우렁더우렁 자두나무 사이를 걷는데, 아찔한 향기에 취해 잠시 걸음을 멈춘다. 꽃인가 싶어 자세히 보니 가지를 뒤덮은 나비 떼가 파르르 날갯짓한다.나무가 열매보다 먼저 꽃을 피운 길이다. 향기 없는 꽃이 있을까마는 여느 꽃보다 자두 꽃의 진한 향기가 온몸에 밴다. 목련처럼 인심 넉넉한 꽃송이를 피워 사람을 불러들이지도 않고, 앙증맞
경주 낭산(狼山) 골짜기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왕릉을 한 바퀴 휘돌아 넓은 들에도 안부를 묻는다. 명지바람은 농수로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에 머물다가 그 다리를 건너 풀꽃들에 손을 내민다. 코끝을 스치는 쑥, 명주꽃, 냉이의 향기는 연둣빛으로 물든 들판에 향긋한 지문으로 남는다.오늘은 보문동에 위치한 진평왕릉을 찾았다. 경주의 고분을 시시때때로 보았지만, 웅장함보다는 온화한 느낌이 든다. 호석이나 둘레를 친 돌난간, 문인석, 무인석 등 왕릉을 수호하는 석물이 없다. 그래서일까. 팽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들이 도열해 왕릉을 지킨다.나
봄꽃이 다투어 망울을 터트릴 기세다. 고향마을 곳곳에도 이미 복숭아나무가 발그레한 꽃눈을 내민다. 마당 한쪽에 서 있는 음나무도 가지 끝에 봄을 머금었다. 하나도 꾸밈이 없는 봄 햇살이 음나무를 비추고 그 가지에 뭉게구름 한 점 걸려있다. 나무가 있는 한 편의 수채화이다.4월은 꽃들이 그 아름다움을 폭로하는 때다. 그런데 꽃도 아닌 나무에 눈독을 들이는 이가 있다. 한 철, 한 끼의 밥상에 오를 음나무의 새순을 기다리는 옆집 뒷집 아낙들이다. 어머니는 순식간에 활짝 피는 새순을 기다렸다가 한 소쿠리 푸짐하게 따서 데친다. 푸른 냄새
봄은 소리 없이 온다. 겨우내 사납게 휘몰아치던 바람이 제풀에 지칠 즈음, 때를 노려 땅속에서 생명이 꿈틀거린다. 무포산 나무들도 하나씩 깨어나 물기를 빨아올린다. 청송군 피나무재의 자작나무 숲에는 벌써 봄이 와 있다.마음이 가고 소리가 나는 데로 걷다 보니 어느새 자작나무 숲에 들었다. 새하얀 수피를 찢고 나온 나뭇가지가 손을 내민다. 손가락 하나 정도의 굵기와 서너 개를 합쳐 놓은 굵기가 서로 어긋나게 자라고 있다. 찢어지고 해진 수피에 손을 대자 바스락거리며 껍질 하나가 떨어진다. 숲에는 생각하는 것도 소리로 들린다. 쭉쭉 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