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사고로 어려서 두 다리를 잃은 20세 청년이 대구역에 살고 있었다. 기차 바퀴에 깔려 무릎만 남고 두 다리가 달아났으면 기차역 쪽은 눈으로 보기도 안쓰러울텐데 기차역 부근을 맴돌며 구걸을 하고 살았다. 지금부터 꼭 44년의 세월이 흘러간 지난일이지만 바로 어제 목격한 일인듯 그 때 목격한 뒷골목의 풍경이 영원히 잊혀지지 않는다. 대구역 앞에는 부모없는 거지 아이들이 떼를 지어 역 대합실을 근거지로 살면서 구걸을 했다. 두 다리가 없는 청년의 키는 여섯살 정도 아이의 키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조카 같은 여덟살 먹은 거지아이의 발길에 차여 다리없는 20세 청년이 서럽게 울고 있었다. 열 두살이나 어린 8세 아이에게 얻어 맞다니 억울하고 분했을게다. 다리가 없어 무릎으로 기다보니 공격할 힘이 전혀 없
문인작가는 좋은 작품을 생산하여 독자들의 가슴을 포근하게 감싸주지만 정작 작가 자신은 문학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경우가 많다. 몇 해전 우리나라 문학상(文學賞)이 유명, 무명을 통털어 300종이 넘는다고 신문에 번잡한(?) 구설이 오고 갔다. 문학상 300종은 옛날 이야기고 지금은 너끈히 400종은 되리라. 자칭타칭 문인이 2만명이 훨씬 넘으니 문학상과 문인(?)의 비율이 50:1도 넘는다고 본다. 달랑 상장 한장 뿐인 문학상도 더러 있는 것 같다. 예비추천위원에 예심위원, 본심위원을 두고 문학상 수상작을 고르니 엄청 엄정한 것 같지만 주고 싶은 사람에게 주는 짜고 치는 고스톱과 조금도 다를 바 없다. 문단에 오른지 마흔 네해가 되고 보니 문학상에 대한 향수(그리움)도 사그라진지 오래다. 문학상을 간
6·25 전쟁 60돌 기념식에 초청장은 받지 않았지만 자진하여 참석했다. 6·25 기념식장은 억새밭이다. 은빛의 물결이 출렁인다. 몇년전부터 6·25 기념식에 꼭 참석했다. 다시 있어선 안될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 결코 잊어선 안될 뼈아픈 공산당의 침략 전쟁이 6·25 전쟁이다. 남들이 6·25를 너무 까마득하게 잊고 살기 때문에 나만이라도 뼈아픈 역사의 교훈을 잊지 않기 위해 6·25 기념식장을 꼭 찾는다. 6·25 기념식에 참석하면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 완창하여 좋다. 보통 사람들은 `6·25 노래`가사도 잘 모르지만, 6·25 기념식에선 `6·25 노래`를 꼭 불러 꺼져가는 나라사랑 마음에 불씨를 되살려 준다. 6·25때 나는 초등학교 3학년 생인 철부지였다. 6·25가 일어나 무기한
D시의 P시인은 시력(詩歷)이 긴 중견 이상의 시인이지만 내가 보기엔 시보다 기행이 돋보인다고 본다. 시인이 많기는 1980년대도 예외는 아니었다. 많은 시인중에 두각을 드러내자니 정상적인 방법으론 가망이 없어 돌출행위가 두드러질 수 밖에 없다. 평소 정의감도 없고 정치적 식견도 없으면서 정부를 까는 시를 발표하여 필화를 일으켜 신문, 방송 등 언론에 편승한다든가 아니면 걸죽한 시 내용으로 한몫을 보는 시인도 한둘이 아니었다. 1980년도 중반의 D시 거주 P시인도 그런 부류였다. 여류문학도중엔 데카당이 많아(?) 시단진출을 위해 중진시인의 애인도 불사하는 경우가 흔했다. P시인이 지은 `나하고 X한번 할테여?/ 시인 만들어 줄께.` 시 추천심사위원 중엔 P시의 이 시를 읽으면 남의 이야기 같지 않은,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유아 출생율이 낮다고 걱정이 태산같다. 내가 보기엔 유아출산율 낮은 것 보다 유아 보호망에 더 문제가 많은 것 같다. 유아에 대한 유괴살해, 아동에 대한 성범죄 살해 등 아동범죄에 대해서는 미미한 범죄에도 솜방망이 처벌을 하지 말고 엄격하게 단호하게 대처해야 한다. 현재 사형수 가운데 아동유괴살해범, 아동성범죄 살해범 등은 법정기일안에 사형을 집행하고 생존하고 있는 아동을 적극적으로 보호해야 한다. 나는 돈독한 신심(信心)이 없으면서도 가족과 국가들 위해 하루 다섯 차례 기도를 꼭 하고 있다. 가족 중에는 8세의 외손자도 포함된다. 아직 친손자가 태어나지 않아 내게 있어서 외손자는 그만큼 더 소중한 존재이기도 하다. 외손자는 얼굴도 탤런트가 돼도 좋을만큼 준수하고 돌 지나고부터 어린애가
나이 들어서 해야 할 필수과제가 바로 건강관리다. 건강을 제대로 관리하자면 하루 힘드는 운동을 연속적으로 20분 이상 해야 한다는 건강 전문의의 말씀을 들은 적이 있다. 나는 하루 힘들지 않는 운동으로 꼭 13분간을 지금까지 10년 이상 지속적으로 해왔다. 하루 맨손체조 7분과 탁구 6분, 합쳐 운동시간이 13분이다. 탁구는 중학생 때부터 취미삼아 했다. 우리 옆집 친구집에 간이 탁구대가 있어 담 너머로 탁구치는 걸 확인하고 찾아가면 됐다. 가난 때문에 집을 팔아버리고 탁구와 40년 이상 적조했다가 교장이 되고 나서 탁구채를 다시 잡았다. 교장이 교사와 자주 탁구를 치면 직원과의 친소관계로 오해를 받을 수 있고 내 좋다고 교사와 탁구를 치자고 하면 교사시간을 침해 하기 십상이라 혼자서 벽치기를 하든지 공중으
빠르다 빠르다 해도 세상에, 세월보다 빠른 것은 없다. 가장 믿고 마음을 주고 받던 전 고령교육장 이용우 사백님이 세상을 작별하신지 눈 깜짝할 새 1년을 넘겼다. 그동안 나는 마음속으로 형님으로 모시던 이용우 사백에 대한 글을 단 한줄도 적지 못했다. 그것은 내가 관심이 없어서가 아니라 충격이 너무 컸기 때문이기도 하다. 문단 경력이 어느새 마흔 네 해가 되어 전국적으로도 왕(?) 고참에 든다. 요즘 하루가 멀다하고 신간서적 기증본을 쇄도하게 읽었다. 심지어 책장의 파리똥까지 글자로 착각하고 읽었었다. 바쁜 중고등학교 교사가 수업만 해도 그 당시는 주당 24시간이 넘었는데 기증본을 다 읽을 도리가 없어 뒤에는 책 제목과 같은 작품을 먼저 읽고 내용에 감명을 받으면 나머지 작품도 읽어주었다. 이웃끼리 떡 한
우리 민족은 한민족(韓民族)인데 약소국가로 오랜 세월을 살다보니 한민족 아닌 한민족(恨民族)이 된 것 같다. 요사이는 밝은 노래가 대중에게 잘 먹혀들지만 일제강점기와 건국초창기에는 슬픈 노래가 대중의 사랑을 받았다. 일제 강점기 노래는 노래의 가락도 슬퍼야 됐지만 가사도 마무리가 `서럽습니다`, `눈물납니다`로 끝나야 잘된 노래로 대접을 받았다. 지난 5월5일 어린이날 원로가수 백설희(본명 김희숙) 선생이 83세로 영면하셨다. 생전에 `물새우는 강언덕`과 `봄날은 간다`란 대중가요 중 대표곡을 남겼다. 지금도 필자는 백설희 선생의 히트곡 `물새우는 강언덕`을 들으면 타임머신을 타고 34년이 훌쩍 지난 1976년 여름방학 직전의 낙동강 모래밭에 내리게 된다. 요사이 문인 풍년이 들어 문인의 희소가치는 커
조용한 일상(日常)이기에 전화벨이 울리면 솔직히 반갑다. 요사인 지방선거를 앞둔 시기탓인지 지인이 건 전화보다 여론조사 전화가 오기 일쑤다. 소요시간이 2분정도니 끊지말고 받아달란 주문이 따른다. 대개 이번 선거에 투표할거냐, 안할거냐가 첫 설문이다. 내용을 보면, 1. 절대 안하겠다 2.안하겠다 3. 모르겠다 4. 하겠다 5. 꼭 하겠다 식으로 묻는다. 설문이 몇번까지인지 모르니 정확하게 답할지 어리둥절할 때가 많다. 투표는 참정권의 적극적 표현으로 국민이 마땅히 해야할 당연한 의무인데 투표를 안하겠다는 것을 첫 문항에 배치한 것은 여론조사를 빙자한 투표 보이콧 선동같이 느껴진다. 가치체계상 투표를 꼭 하겠다가 맨끝머리 5번이 되어선 안되고 1번에 배치해야 한다. 설문 응답이 자기들이 유도하는대로 안되
평소 남의 말꼬리나 물고 늘어지는 잡당 화상(?)들과는 상종도 하지 않는다. 그런 내가 오늘은 예외로 말꼬리를 잡고 늘어지는 처량한(?) 신세가 되었다. 천안함 침몰 구조작업을 하다가 남자중 남자요, 군인중 군인인 한주호 준위님이 순직을 하여 해군장으로 의식을 마치고 국립대전현충원에 안장이 됐다. 온국민이 그분의 명복을 빈, 거룩한 죽음이었다. 말이라면 평소 전매특허(?)를 받은 손가락 꼽는 큰 방송국 뉴스시간에 한주호 준위는 화장을 마치고 유골이 국립현충원에 영면(永眠)케 했다고 방송을 했다. 영면이란 말의 뜻은 영원히 잠든다는 뜻으로 `죽음`을 뜻하는 말이다. 한 준위님의 경우 국립현충원에 `영면`케 했다는 말은 말도 안되는 소리요 국립현충원에 `안장`됐다고 해야 맞다. 일류 신문사도 일류 방송국도 일
미국이 대국(大國)인 것은 국가의 덩치가 커서가 아니라 미국인들의 생각이 대범하기 때문이다. 미국인들은 올림픽대회에서 자국 선수들이 따낸 메달을 금빛, 은빛, 구리빛의 색깔에 관계없이 똑같이 성공한 것으로 차별하지 않고 균등하게 대우를 한다. 우리나라 국민들 같이 올림픽 메달의 빛깔에 민감한 국민은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둘도 다시 없을 것이다. 일제 강점기인 1936년 베를린 올림픽대회 마라톤 경기에 일장기(日章旗) 마크를 가슴에 달고 출전한 나라없는 우리민족 선수는 두 명인데 둘다 선전분투하여 당당히 둘 다 메달을 획득하여 불운한 우리 민족에게 큰 기쁨을 선사하여 당연히 민족의 영웅이 되었지만 금메달을 딴 손기정 선수는 민족의 영원한 스타가 되었지만 악조건에도 불굴의 정신을 발휘하여 동메달을
정권이 바뀔 때 마다 국정개혁이란 구호가 난발됐지만 피부에 와닿는 개혁은 한 건도 없는 것 같다. 지난 좌파정권 때 개혁이란 국정(國政)의 축을 우에서 좌로 옮기는 행위를 개혁이라 강변했는데 진짜 개혁은 전무(全無)하고 개혁 아닌 개악(改惡)만이 판쳤다. 위정자들의 개혁구호가 민초들에겐 개가죽(개껍데기) 만큼도 매력이 없다. 개껍데기의 맛은 개고기 중 최상의 별미다. 새 정부에서는 진짜 유익한 개혁이 이뤄지기를 열망하면서 시골 무지랭이의 우견(愚見)을 두 가지만 말씀드려 볼 까 한다. 1. 새 봄에 새 학기를(4월1일을 신학기로) 3공때부터 신학기가 4월1일에서 3월1일로 개악됐다. 3월은 계절적으로 봄이 아니라 분명히 겨울이다. 추위에 옴추린채 새학기를 시작하니 위축될 수밖에 없다. 새로 바뀐 선생
소년 시절에 나는 소원이 한가지 있었다. 나의 시를 서울에서 나오는 유명잡지나 유력한 일간신문에 더도 덜도 말고 한 번만 발표되면 더 바랄 것이 없다고 열망했다. 1960년 12월 초에 육군에 입대했다. 1962년 여름 나는 서울 육군본부 행정병으로 부완감실에서 근무했다. 사무실에 배달되는 동아일보를 보니 국민시조부흥운동의 일환으로 동아시조를 공모하여 입선작을 주 1회 싣는다는 반가운 소식이었다. 뽑힌 작품에는 원고료도 지급한다는 게 아닌가. 고 2시절 교내 백일장 최우수상 수상경력도 있고 하여 망설일 것도 없이 대뜸 투고를 했다. 투고하고 나서 3주일이 지났을까, 1962년 8월14일자 동아일보에 나의 처녀작 `고향 길`이 한 글자의 가감도 없이 그대로 원안대로 발표됐다. 부근에 있는 동아일보 보급
연말이 가까워 오니 술판이 늘어난다. 한해 한 번도 못 만난 지인들이 술자리에서 감격적인 해후를 한다. 술꾼들은 자나깨나 밤낮 술 먹을 핑계만 찾는다. 농부 K씨는 밥보다 술을 더 좋아한다. 배고픈 것은 참아도 술 고픈 것은 못 참는단다. 농부 K씨는 술 먹을 구실이 없으면 논 뚝 무너진 셈치고 실제로는 안 무너졌으니까 수리비가 안더니 그 돈으로 술을 마신단다. 술자리에 앉은 모습들을 보니 세상근심은 탈영을 하고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물씬 난다. 사실 필자는 술에 대한 글은 쓸 자격(?)이 없다. 육십 평생에 내가 비운 주량이 술 반 되에도 미달이다. 여러 차례 `KB 주`문학상에 서류를 냈지만 그때마다 고배를 마셨다. 평생 소주 한 잔 마시는 일이 없는 내 사정을 어찌 알고 번번이 퇴짜다. 하기야 술꾼들에
`사형수의 자살`, 무슨 3류 소설의 제목 같지만 11월22일에 있었던 우리나라 법창실화다. 우리나라같이 과잉 인권국가는 지구 상에 없을 것이다. 부녀자 13명을 잔혹한 방법으로 연쇄살인한 죄로 사형이 확정된 사형수 정00 살인마가 스스로 목매어 자살을 했다. 기네스북에 오를 쾌거(?)다. 타살, 자살 모든 살인형태를 섭렵했으니 그야말로 살인의 달인이다. 통 큰(?) 대통령인 K.R. 두 대통령은 사형수에 대한 사형집행을 무시해 와서 흉악범도 늘고, 공권력도 있는 둥 만둥이고 국가기강이 말이 아니다. 사형수는 사형이 확정된 지 6개월 내로 법무부 장관 결재를 얻어 사형 집행하도록 되어 있다. 6개월이 넘도록 형을 집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어처구니없이 사형수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교도관이 감시를 소홀
2009년 김천시 문화상 수상자가 발표됐다. 교육문화체육부문 수상자로 오성열(61) 교사가 선정됐는데 공적사항을 살펴보면 오성열 교사는 김천지역중학교 체육교사로 재직하면서 복싱, 유도 육상, 세팍타크로 등 학교운동부를 창단해 탁월한 지도력을 발휘하여 전국대회 우승을 이끄는 등 김천의 명예를 높였다고 한다. 그동안 궁금했다. 오 선생님이 어느 학교에 근무하고 직위는 얼마큼 도달했는지 문득 궁금할 때가 있었다. 오 선생이 나와 처음 만났던 것은 35년전 1974년 3월초 였다. 대학을 졸업하고 군복무를 마치고 초임교사로 문경중학에 첫 발령을 받았다. 나와 얼굴을 마주한 것은 두 달에 불과했지만 성격이 밝고 사교적인 오 선생은 한양 동기인 탤런트 김자옥양 얘기를 구수하게 잘 엮었다. 평소 연예통인 필자는
요사인 여자가 진출하지 않는 부문이 없을 정도로 여성의 사회활동이 남성 뺨칠 만큼 활성화 되어 있다. 어떤 시 교육청엔 초등교사 임용시험에 여교사 합격률이 91%로 앞으로 초등교단엔 청일점 시대 도래가 초읽기가 되어가고 있다. 지금부터 50~60년 전에 처녀 뱃사공이 있었다니 대단히 놀라운 일이다. `처녀 뱃사공`이 미초의 입에 처음 오른 것은 1957년의 일이다. `낙동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으로 시작되는 `처녀 뱃사공` 가사는 `섬진강 강바람이 치마폭을 스치면…`으로 되어야 맞다. `처녀 뱃사공`노랫말을 지은 윤부길씨는 가수 윤항기 목사의 선친이다. 옛날엔 교통이 불편한 관계로 내왕이 적고 불편하여 경상도를 흐르는 강은 무조건 낙동강으로 알았던 모양이다. 낙동강 말고도 경상도를 흐르
낙엽이 지면 도지는 병이 있다. 이른바 신춘문예 열병이다. 요즘 유행하는 `신종플루`이상의 불치병(?)이 신춘문예 열병이다. 문학도라면 신춘문예열병을 해마다 연말연시에 앓아 봤을 것이다. 단풍이 끝나고 낙엽이 질 무렴, 일간신문 마다 신춘문예공모 사고로 러시아워를 이룬다. 모집 장르도 여러 부문이고 당선 상금(고료)도 글을 써서 벌기 어려운 거금을 투척하고 있다. 나도 신춘문예가 당선되기 전까지는 신춘문예 열병을 심하게 앓았다. 우리나라에 신춘문예가 처음 시행된 것은 일제강점기인 1925년 동아일보에서 처음 시행되었고 뒤이어 1928년에는 조선일보도 신춘문예를 실시했다. 우리나라의 주요 작가와 시인들이 신춘문예출신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요사이 `친일인명사전`이 출간되어 때아닌 평지풍파를
매운탕 집 이름이 `메기의 추억`이다. 매운탕 집 이름으로 기발한 옥호다. 민물고기 매운탕 어종으로, 메기가 최고란다. 나는 스물이 넘고부터 민물고기는 일체 먹지 않게 되었다. 이유는 비린내 때문인 것 같기도 하지만 잔챙이 민물고기뿐 아니라 잉어도 내겐 음식으론 나무막대기나 다름없다. `메기의 추억`은 내게 없지만 미국 민요이자 세계 명곡인 `메기의 추억`은 내 귀에 별미다. `메기의 추억` 멜로디가 어렴풋이만 들려와도 나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다. 내 잠을 깨우는 데는 자명종보다 `메기의 추억`소리 효과가 절대적이다. 일류국가란 목소리 큰 사람이 판치는 나라가 아니라 음악 수준이 높은 나라다. 음악을 좋아한다고 무조건 음악 수준이 높은 것은 아니다. 오늘날 이 땅의 유행가는
텔레비전의 우민화 정책(?)에 강하게 튀면서도, 어김없이 목요일 밤 9시의 단골손님이 된다. 모 방송의 `세상에 이런 일이`의 개근생이 되었다. 같은 프로의 제3탄(세 번째 이야기)이 내 가슴에 명중이 되었다. 충북 보은이라면 그전엔 대추 고을로 널리 알려졌지만, 근년엔 가수 태진아씨의 고향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산골 밭 한 마지기도 없이 여러 남매를 키우다 보니, 학력이 초등졸업으로 평준화됐고, 초등학교만 졸업하면 배고픔을 참지 못해 고향을 등졌단다. 태진아도 예외가 아니었다. 서울로 튀어(?), 중국집 철가방 맨으로 전전하다가 무교동 지하식당에서 서빙을 하게 됐다. 늘 오는 단골손님, 작곡가 서승일씨가 태진아의 싹수를 알아보고 가수로 밀어주었다. 태진아의 본명은 조방헌(曺邦憲)이다. 태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