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전 일간신문 경제면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났다. `우리투자증권 사장에 김원규 전무가 취임했다. 김 전무는 우리투자증권 사상 처음으로 사원에서 사장에 오른 인물이다. 김 전무는 1960년 생으로 대구상고와 경북대를 나와 1985년 LG투자증권에 입사했다. 이후 금융상품영업팀장, 강남지역 본부장, 퇴직연금그룹장, WM사업부 대표 등을 지냈다. 김 전무의 사장 선임은 우리투자증권 역사에서도 의미가 있다는 평가다. LG투자증권 시절을 포함해 우리증권과 합병해 탄생한 우리투자증권까지 사원에서 사장에 오르는 인물로는 처음이기 때문이다` 사실 김 전무는 1961년생이다. 3남 1녀 중 2남으로 위로 형과 누나, 그리고 남동생이 있다. 산골에서 중학교까지 졸업하고, 대구상고 야간에 진학했다. 그 무렵 그의
“얘야, 오늘은 내가 밥을 차려줄테니, 그냥 집에서 밥 먹자” 3년전 이맘때의 일이다. 이미 20여년 전 홀로 된 엄마는 아버지가 남겨준 대구 경북대학교 부근의 작은 아파트에서 거주했다. 가끔 집에 들르는 막내아들과 나들이하는 것은 빈한한 농사꾼의 아내로 살아온 엄마의 큰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면소재지에 있는 안평장터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백고무신을 신고 10리길을 걸어야 했지만 장터 입구에 있는 왁자지껄한 중국집에서 아버지가 사준 자장면 한 그릇으로도 즐거워했다. 그래서 농사일이 끝나고 담배수매로 목돈을 쥔 아버지가 몇 일씩 집을 나가 그 돈을 다 쓰고 돌아와도 별말 없이 남편 앞에 밥상을 차려내던 엄마였다. 사별한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인지 엄마는 가물에 콩 나
신문을 읽을 때마다 왜 이렇게 큰 종이에 인쇄하는지 궁금했었다. 큰 종이에 인쇄하면 돈이 적게 들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었는데, 알고 보니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신문이 나올 초창기인 1712년 무렵 영국의 신문사들은 신문의 페이지 수에 따라 세금을 내야 했다. 그래서 신문사들은 페이지 수를 줄이려고 지금과 같은 크기의 종이를 선택했다. 1855년에 이르러 세금이 없어졌고, 큰 종이에 신문을 인쇄하려면 엄청난 추가 비용이 드는데도 신문사들은 기존의 판형을 바꾸려 하지 않았다. `메트로`라는 무료 신문이 발행된 후 2003년에야 `인디펜던트(The Independent)`의 `타블로이드판`이 처음 발행되었다. 이 신문의 판매량이 급등하자 `타임즈`와 `가디언`도 새로운 변화에 합세해 작은 신문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