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재원 국회의원

“얘야, 오늘은 내가 밥을 차려줄테니, 그냥 집에서 밥 먹자” 3년전 이맘때의 일이다. 이미 20여년 전 홀로 된 엄마는 아버지가 남겨준 대구 경북대학교 부근의 작은 아파트에서 거주했다. 가끔 집에 들르는 막내아들과 나들이하는 것은 빈한한 농사꾼의 아내로 살아온 엄마의 큰 즐거움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린 시절 아버지와 면소재지에 있는 안평장터에 나가는 것을 좋아했다. 백고무신을 신고 10리길을 걸어야 했지만 장터 입구에 있는 왁자지껄한 중국집에서 아버지가 사준 자장면 한 그릇으로도 즐거워했다. 그래서 농사일이 끝나고 담배수매로 목돈을 쥔 아버지가 몇 일씩 집을 나가 그 돈을 다 쓰고 돌아와도 별말 없이 남편 앞에 밥상을 차려내던 엄마였다.

사별한 아버지와의 추억 때문인지 엄마는 가물에 콩 나듯 찾아온 자식들과 허름한 아파트 단지 근처 중국음식점에 가서 가벼운 외식만을 해도 무척 좋아했다. 나는 한 두번 엄마와의 나들이만으로도 효자가 된 듯 착각했다. 엄마는 나에게 바라는 것도 없이 천년만년 기다리고 있다가 밥 한번 사주면 소녀처럼 좋아하는 무던한 존재였다.

그런데 그날따라 엄마는 나에게 밥상을 차려내겠다고 했다. 엄마가 차려낸 밥상에는 수북한 밥 한 공기와 두부를 넣고 끓인 된장국, 그리고 김치와 나물반찬이 전부였다. 엄마가 평소 먹는 밥상이었지만 입맛이 없다며 엄마는 수저를 들지 않았다. 나는 혼자 밥을 먹었다. 밥상위의 된장국이 소태처럼 짰다.

“엄마, 국이 너무 짜요”

엄마는 말했다. “요즘은 짭쪼름해야 입맛이 도니 소금을 많이 퍼 넣어서 그럴거야”

장성한 4남매와 남편이 모두 떠난 작은 아파트에서 홀로 살아가던 엄마는 그 무렵 폐암진단을 받고 항암치료 중이었다. 바쁘다는 핑계로 늙은 엄마를 제대로 돌보지 않은 우리 형제는 뒤늦은 회한에 가슴을 쳤다. 형은 `우리가 죽일 놈`이라고도 했다. 독한 항암치료 탓으로 엄마는 이미 맛을 제대로 느끼지 못하는 상태였던 것이다. 나는 소금국 보다 짠 된장국을 입으로 퍼 넣으며 엄마의 얼굴을 살폈다. 지친듯 거실 바닥에 돌아누운 엄마의 등짝이 보였다. 새끼들이 떠난 노인의 쭈그러진 등짝은 사실 너무도 허전해서 바라볼수록 눈물이 났다. 모든 새끼들을 업어키운 위대함 뒤에 홀로 남은 외로움이 그대로 드러나 보였기 때문이다. 소태같은 된장국에 내 눈물까지 섞어서 밥을 말아 얼른 퍼 먹어치웠다.

그로부터 석달 동안 엄마는 집과 병원을 오가며 항암치료와 수술로 고통스럽게 버티다 홀연히 저 세상으로 떠나버렸다. 막내아들인 나와 손잡고 나들이 하던 작은 즐거움은 그날 이후 단 한번도 더 누리지 못했다.

남은 자식들은 서둘러 장례를 치르고 엄마를 고향마을 뒷산의 아버지 산소옆에 묻었고, 엄마가 남겨준 아파트와 예금을 해약해 나눠가졌다. 그리고 아무일도 없었던 것처럼 일상으로 돌아갔다.

갈대밭에서 살아가는 염낭거미의 어미는 갈대잎을 말아 만든 알집에 알을 낳아 알이 부화될 때까지 그곳을 지킨다. 새끼는 알에서 깨어 나와 첫 번째 탈피를 하면서 눈앞에 있는 어미에게 달려들어 어미의 살을 파먹는다. 어미는 새끼에게 몸을 먹이로 내주고, 새끼는 어미의 몸을 먹고 자라나 성체가 된다.

가쁜 숨을 쉬며 등을 보이고 누워있던 그날의 쓸쓸하고 허전한 엄마의 모습을 나는 잊지 못한다. 그 등에 내 몸은 기대어 잠들며 자랐고, 마침내 홀로 섰지만 엄마는 늙고, 병들어갔다. 어미의 살을 파먹고 자라난 염낭거미의 새끼처럼 나도 엄마의 살을 파먹고 살아온 것이다.

세상의 모든 생명이 넘실거리는 아름다운 계절 오월이 되면 나는 그날 엄마가 차려준 마지막 밥상이 생각난다. 깊이를 모를 엄마의 쓸쓸함과 외로움을 알지도 못하고 훌쩍 보낸 회한과 후회로 가슴을 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