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만든 경북여성 (1)
최고 훈장을 받은 여성독립운동가(下) 남자현

남자현 기와그림.

일제 만행 국제사회에 알리기 위해
손가락 두마디 잘라 혈서와 함께 전달 시도
만주 일본 전권대사  부토 처단 계획 밀고로 실패
가혹한 고문·단식 항거로 끝내 순국

△의열투쟁으로 만주를 울리다

남자현의 이름이 만주지역 독립운동사에 널리 드러난 것은 1927년에 일어난‘길림사건’이다. 이는 안창호를 비롯한 독립운동계 지도자 300여 명이 중국 관헌에게 붙잡혀 갇힌 일이다. 당시 독립운동계는 대동단결을 다지기 위해 길림에서 큰 집회를 열었는데, 그 때문에 중국관헌에게 체포된 것이다. 이들 가운데 최종 47명이 길림감옥에 갇혔다.

이때 남자현은 이들을 옥바라지하며 이 일을 여러 곳에 알리고 비상대책반을 꾸리는 등 뛰어난 활약상을 보였다. 남자현과 독립운동계의 이러한 노력으로 독립운동가들은 무사히 풀려나게 됐다.

길림사건 전후로 남자현의 활동은 큰 변화를 보였다. 교육활동에서 의열투쟁으로 전환한 것이다. 의열투쟁이란 적의 주요기관이나 주요인물을 직접 공격하는 투쟁방법으로서 불특정 다수를 공격하는 테러와는 근본적으로 다른 방략이다.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자에 따르면 남자현은 사이토오 총독을 처단하려 나섰다. 1927년 4월 박청산·김문거·이청수 등과 함께 길림성 안에서 계획을 세웠다. 혜화동 28번지 고아무개 집에 머물며 교회신자로 변장하고 총독 암살을 준비했다. 그러나 남자현은 끝내 뜻을 이루지 못하고 다시 만주로 돌아갔다.

그런데 일본의 만주침략을 비난하는 국제여론이 일어났다. 이에 국제연맹은 그 현장을 조사하기 위해 대표단을 파견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자현은 독립의 뜻을 국제사회에 알릴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판단하고 우리민족의 독립의지를 담은 혈서를 써서 전달하기로 했다. 그녀는 국제연맹조사단장 릿튼이 방문하는 1932년 9월 19일을 혈서 전달 날짜로 잡았다.

남자현 지사 순국 직전 모습.
남자현 지사 순국 직전 모습.

남자현은 하얼빈 남강에 있던 한 중국인 음식점에서 왼쪽 무명지 두 마디를 잘랐다. 그리고 ‘한국독립원(韓國獨立願)’이란 다섯 자를 썼다. 독립을 원하는 우리 민족의 뜻을 붉은 피로 쓴 것이다. 그리고 잘린 손가락을 함께 싸서 국제연맹조사단에게 전달할 기회를 살폈다. 그러나 경계가 엄중해 쉽게 기회가 오지 않았다. 비록 뜻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남자현이 보여준 기개와 용기는 남성들도 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이 의거 뒤 남자현은 만주에 파견된 일본 전권대사 부토를 처단하려는 계획을 세웠다. 만주국 1주년 행사가 열리는 1933년 3월 1일을 거사일로 정했다. 남자현은 우선 무기 확보를 위해 부하 정춘봉을 비롯한 몇 명의 중국인과 무기 조달방법을 논의했다. 마침내 권총 한 자루와 탄환, 그리고 폭탄 두 개 등을 전달받기로 했다. 2월 23일 오전 10시 남자현은 거사장소를 확인한 뒤 노파로 변장하고 무기와 폭탄 운반에 나섰다. 그러나 밀정의 밀고로 거사 직전인 2월 27일, 하얼빈에서 일제경찰에 체포되고 말았다.

△마지막 뜻“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

남자현은 하얼빈 주재 일본총사관 감옥에서 여섯 달 동안 가혹한 고문에 시달렸다. 그러다가 이렇게 욕되게 사느니 차라리 죽음으로 항거하자는 결단을 내리고 단식투쟁을 시작했다. 남자현은 음식을 끊은 지 9일 만에 병보석으로 풀려났지만 가혹한 고문과 단식으로 몸 상태는 최악이었다. 감옥을 나온 남자현은 한 여관에서 아들과 여러 동지들의 간호를 받았다. 그러나 끝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고, 그녀는 몇 가지 유언을 남겼다. 하나는 조선이 독립되는 날 자신의 돈 200원을 독립축하금으로 바치라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손자에게 교육을 시켜 내 뜻을 알게 하라는 유언이었다. 그리고 “독립은 정신으로 이루어진다”는 말을 남겼다고 전한다.

혼수상태로 풀려난 지 닷새만인 1933년 8월 22일, 그녀는 61세로 순국했다. 장례는 바로 다음날 오후에 진행됐다. 8월 23일 오후, 유지 30여명이 모인 가운데 조선여관에서 영결식이 치러졌고 마가구 공동묘지에 안장됐다. 5일 뒤 ‘부토(武藤信義) 모살범(謀殺犯)’이라는 제목 아래 그녀의 순국 사실이 국내 언론에도 보도됐다. 50일 뒤인 1933년 10월 12일 오후, 하얼빈의 외국인 공동 묘지에 묻힌 남자현 묘 앞에 비석이 세워졌다.

1934년 1월 간행된 한국독립당 기관지‘진광(震光)’창간호(중국 항주 발행) ‘여걸 남자현 선생전’에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경술국치이후에는 비록 김섬·애향·계월향같은 의기가 나오지 않았지만, 신혼의 여운을 버리고 조국을 위해 의병을 조직하여 국내와 만주를 돌며 백절 불굴의 정신으로 적과 맞서 수십년을 일관되게 투쟁한 여걸이 출현하였다. 그가 바로 근대한국의 여걸로 손꼽히는 남자현이다.”

남자현 지사 묘지.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남자현 지사 묘지.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혁명의 어머니’, ‘전율할 노파’남자현의 투쟁을 기리는 작업은 해방 뒤 한국여성단체에서 이어갔다. 남자현은 전통적인 규범 속에서 성장한‘구여성’이었다. 그러나 당당히 그 껍질을 벗고, 46세의 나이에 외아들을 데리고 만주로 망명했다. 그 뒤 14년 동안 만주에서 조국광복을 위해 헌신했다. 나라에서는 그 뜻을 기려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하얼빈에 있던 그녀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고향인 경북 영양군에서는 남자현을 기리는 일이 추진됐다. 1999년 11월, 영양군은 남자현 지사 생가를 복원했다. 위치는 영양군 석보면 지경리 394번지(석보로 208) 일원이다. 원래 생가지가 있었던 393-6번지 바로 옆이다. 본채·문간채·추모각 등의 건물과 기념비를 세웠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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