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세대 서양 음악가로 활발한 활동
제1세대 서양 음악가로 활발한 활동
  • 윤희정기자
  • 등록일 2019.07.29 19:09
  • 게재일 2019.07.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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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만든 경북여성 (4)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성악가 추애경(上)

미국 유학시절의 추애경(1933년).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추애경은 영남지역 최초의 여성 성악가다. 대구 신명여학교를 1919년(제7회)에 졸업하고 서울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한 추애경은 신명여학교에서 교편을 잡으면서 음악활동을 했다. 이후 일본과 미국에 유학해 피아노와 성악을 전공했다. 특히 미국에서 음악대회에 출연해 호평을 받은 바 있다. 당시 시대상황으로 인해 한국으로는 귀국하지 못했지만, 제1세대서양음악가로서 활발한 활동을 하며 후배 여성들이 음악가로서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초석을 놓았다.

신명여학교 재학 시절 음악가 박태준·현제명 등과 만나
1921년 이화학당 입학 성악 전공·1927년 미국 일본으로 유학길


△교회를 다니며 성악가로서의 꿈을 키우다

제1세대 서양음악가 추애경(秋愛卿·1900~1973)은 대구시 중구 동산동 10번지에서 아버지 추영옥과 어머니 최복경의 2남2녀 중 세 번째 2녀로 태어났다. 당시 아버지 추옥은 서문시장에서 건어물상회를 운영했는데, 상호가 청송이라 청송댁으로 불렸다고 한다. 추애경의 원래 이름은 추동암(秋東岩)이었다. 어릴 적부터 신명여학교를 다닐 때까지(1915~1918)는 추동암으로 불렸지만, 신명여학교를 졸업한 후 이화학당에 입학하면서부터는 추애경이란 이름으로 개명했다.

추애경은 대구사립고등보통학교를 4년간 다녀 졸업했는데, 당시 보통학교의 모든 과정은 4년간이었다. 정확히 언제 고등보통학교를 다녔는지는 알 수 없지만 1915년에 중학교 과정인 신명여학교에 입학했으므로, 1911년에 입학해 4년간 보통학교 과정을 마쳤을 것으로 짐작되고 있다.

당시 집안사람들 모두가 교회에 다니지 않았지만 추애경은 1914년부터 제일교회에 다니기 시작했다. 당시 신명여학교에 입학하려면 교회에 출석하고 있어야만 가능했기 때문이다. 추애경은 이곳 제일교회에서 장래 남편이 되는 김태술(1899~1979)을 비롯해 성가(聖歌)를 좋아하고 즐겨 부르는 음악가 박태원(1897~1921), 박태준(1900~1986), 권영화(1899~1935) 그리고 현제명(1903~1960) 등을 만나게 된다. 당시 이들은 모두 잘 아는 친한 사이였다.

△이화학당에서 성악을 전공하고 교사가 되다

1914년, 곧 대구사립고등보통학교 4학년 재학 때부터 종로에 위치한 제일교회에 다닌 추애경은 이듬해(1915년) 같은 기독교계 학교인 신명여학교에 입학해 고등보통과 4년 과정을 마치고 1919년에 졸업했다. 곧 신명여학교 제7회 졸업생(3월 19일 졸업)이 되는데, 그해 3월 8일 3·1운동의 시발점이 되는 대구 서문시장에서 주도적으로 앞장서 만세를 부르기도 했다.

신명여학교를 1919년 3월에 졸업한 추애경은 2년 후 1921년에 이화학당대학예과(1917년 이전에는 중등과)에서 성악(소프라노)을 전공해 1923년 제16회로 졸업했다. 그리고 이화학당 본과에 다닌 추애경은 그해 8월에 개최된 만국기독청년회 주최의 하령회(A Summer Church Conference)에 대구대표로 참석한 바 있다. 이후 1925년에 본과과정을 마치고(제11회 졸업) 신명여학교에 교사로 재직하게 된다. 당시 일간지에 교육자로서 자신의 포부를 밝히기도 했다. 또한 신명여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면서 대외 음악활동을 주관했다. 1926년 7월, 김성실, 안예아, 한만복, 이찬, 권영화 등 대구청년회·대구여자청년회와 함께 하기음악무도를 대구에서 개최하기도 했다.

동아일보(1933년05월27일2면4단)우리의자랑 미국악단에 빛나는 동방의 꽃 추애경여사 보스톤음악학교에 재학중 유월엔 음악사학위 얻을터.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동아일보(1933년05월27일2면4단)우리의자랑 미국악단에 빛나는 동방의 꽃 추애경여사 보스톤음악학교에 재학중 유월엔 음악사학위 얻을터.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일본과 미국으로의 유학

추애경은 음악공부에 대한 욕심으로 일본과 미국으로의 유학을 결심하게 된다. 당시는 일제강점기라 한국에서 미국으로 곧바로 갈 수가 없었다. 일본에서 미국 가는 배를 타야만 가능했다. 그녀는 미국으로 가기 전까지 일본에서 음악공부를 했는데, 성악이 아닌 피아노 공부였다고 한다. 1926년 일본 규슈 나가사키현에 위치한 가즈이(活水)여자전문학교 음악과에서 피아노 전공으로 수학했던 것이다. 이화학당 및 이화여전을 졸업한 학생들은 당시 외국으로 유학하기 위해 일본 가즈이 여자전문학교를 거쳐 미국 보스톤 등으로 유학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시 이화여전 교수 중 가즈이 여자전문학교를 졸업한 일본인 교수가 있었으며, 미국 보스톤으로 유학한 선배들이 있었으므로 그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이듬해 1927년 6월 4일,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유학의 주선은 이미 현제명을 미국으로 보냈던 로드히버(Homer A. Rodeheaver·1880∼1955) 선교사가 했다. 미국 인디애나주 위노나 레이크에서의 무지개레코드(Rainbow Records)사 창립자이며 기독교음악에 헌신자인 호머 로드히버가 미국행 경비와 뉴잉글랜드음악원의 등록금을 장학금으로 지급함으로써 이뤄졌던 것이다.

1927년 6월 추애경이 미국으로 유학간다고 해 주위 대구음악인들이 송별음악회를 마련했다. 대구를 떠나기 하루 전날 6월 3일 대구제일소학교 강당에서 추애경의 송별음악회가 열렸던 것이다. 1927년 당시 대구에는 음악을 연주할 전문적 음악회장이 없었다. 음악회는 주로 대구제일소학교강당이나 조양회관에서 이뤄졌다. 대구제일소학교강당은 구 중앙초등학교 자리(현재 대구 2·28기념중앙공원 자리)에 있었던 옛 건물이고, 조양회관은 달성공원 주위 옛 원화여고로 사용됐던 위치의 건물이다.

이 음악회는 미국 워싱턴대학으로 음악유학을 떠나는 추애경을 축복하는 발표회다. 추애경 자신을 비롯해, 김애국·주복남·박태준·차원석·견신희가 출연해 연주한 바 있다. 특히 주복남의 피아노반주에 박태준이‘이별가’(잘 가시요)를 노래해 아쉬움을 더욱 표현했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 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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