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지막 남은 집까지 처분 김천고보 설립
마지막 남은 집까지 처분 김천고보 설립
  • 윤희정기자
  • 등록일 2019.07.09 19:58
  • 게재일 2019.07.1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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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만든 경북여성 (2)
일제 강점기 육영사업의 어머니
최송설당(下)

최송설당 동상.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일제 학무국 설립 허가 방해
세계 대공황으로 부족분 생기자

‘송설당’ 집 내놓아 충당
정원 늘리고 전국 최고 교사 초빙
모든 것 기부 85세 일기로 눈감아

△백미 1만섬 규모 서슴없이 쾌척

최송설당이 김천고 설립을 위해 기부한 재산은 김천, 김해, 대전 세 곳에 흩어져 있는 20만2천100원 상당의 토지와 10만원의 은행예금까지 모두 30만2천100원이었다. 당시 백미 1섬은 29.77원이었으니 32만원이면 1만섬 이상을 살 수 있던 엄청난 규모다. 최송설당은 빼앗긴 나라를 건지려면 인재를 길러야 한다고 생각해 인문계 고등학교를 설립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일제 학무국이 설립을 허가하지 않고 상고나 농고를 만들라고 했다. 물러날 송설당이 아니었다. “인문계 고보 설립허가를 내주지 않으면 기부를 취소하겠다.”고 나서는 한편 해결책을 찾기 시작했다. 총독부 방침을 고치지 않은 채 인문고를 건립한다는 목표는 힘들 것으로 판단했다. 인문고 허가를 받기 위해 사이토오(霽藤實) 총독의 아내를 만나 간곡하게 뜻을 전했다. 결국 총독부는 1930년 10월말, 김천고보 설립을 허가하는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이듬해 1월, 고등보통학교 규정 일부를 개정해 인문고에 실업과목을 첨가했다. 그런데 밀고 당기면서 개교가 일 년 늦어지는 바람에 설립자금 충당에 차질이 빚어졌다. 원래 송설당이 기부하기로 했던 재산이 30만2천원에 1930년도 수익예상금이 2만6천원이었는데, 세계 대공황의 여파로 쌀값이 폭락하는 바람에 1만6천원의 부족분이 발생했다. 당장 총독부 학무국이 제동을 걸고 나왔다. 그러나 최송설당은 물러서지 않고, 마지막 남은 처소인 무교동 55간 짜리‘송설당’집을 내놓겠다고 선언했다. 무교동집 평가액이 2만3천원이어서 총독부의 이의제기를 막기에 충분했다. 1931년 2월 5일, 재단법인 송설당교육재단이 인가를 받았고, 3월17일에 김천고보 설립이 총독부 학무국에 의해 정식 승인(총독부 고시 제145호) 됐다.

△적막한 김천을 활기찬 김천으로

동아일보 1931년 4월 25일자는“최송설당의 김천고보 개교는 적막의 김천을 활기의 김천으로, 초야의 김천을 이상의 김천으로 만들었다.”고 평가했다. 김천고보 초대교장은 안일영이었다. 학생을 받기 위해 1931년 3월27일과 28일 입학시험을 치뤘다. 5월 9일 강당을 준공했다. 5학급으로 시작했다. 나라를 구할 인재양성이 목표던 김천고보는 개교하면서 학생을 정원보다 50%나 더 뽑았다. 빨리 더 많은 인재를 길러내려는 파격이었다. 교사도 전국 최고를 모셨다. 서울 월급의 배를 주면서 최우수 교사로 진용을 갖췄다. 1932년 1월 15일, 제2대 교장 정열모가 부임했다. 애국적 국어학자 정열모 교장의 가르침 아래 수많은 구국 동량들이 김천고보로 몰려왔다.


김천고가 있어서 일제 암흑기 김천은 희망이 있었다. 송설당이 81세가 되던 1935년 11월30일, 동상건립 얘기가 나왔다. 전국에서 뜨거운 호응을 보내왔다. 조만식, 방응모, 윤치호 같은 저명인사는 물론이요, 신의주고보, 동래 일신여학교, 대구계성학교, 금오산공립보통학교 등 학교 단위에서도 성금을 보내왔다. 경향 각지 502명이 5천945원을 동상 제막식 경비로 냈다. 적게는 10전부터 많게는 50원까지 성금을 보내왔다. 제막식 당일은 장관이었다. 전국에서 하객이 물듯 몰려들었다. 김천고보 운동장에는 교직원 37명, 전교생 250명의 세곱절이 넘는 하객 7~800명이 운집했다.

‘사막의 오아시스’김천고 제막식에서 여운형은 송설당이 세운 김천고보를 ‘사막의 오아시스’ 에 비겼다. 일제 탄압이라는 어두운 사막에서 김천고보는 살아갈 희망을 샘솟게 한 오아시스나 마찬가지다. 살아생전 큰 복을 지은 송설당은 기라성 같은 인사 1천여 명의 축하를 받으며 동상을 봉정받았다. 이 모든 것이 감사했던 최송설당은 마지막 남은 한 점 재산까지 다 모아 특별교실(과학관) 건립비용으로 냈다. 무일푼 송설당이 생활비를 아껴 마련한 돈이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기부한 송설당은 1939년 6월 16일 오전 10시40분 재단이사를 비롯한 간부직원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85세를 일기로 조용히 눈을 감았다. 송설당의 묘소는 학교 뒷산에 있다.

최송설당 동상 제막식.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최송설당 동상 제막식. /경북여성정책개발원 제공

△배우지 않으면 옷 걸친 소

최송설당은 수많은 가사와 한시도 남겼다. 3권 3책의 석판본으로 1922년 12월 1일에 발간된‘송설당집’에 실린 송설당의 한시는 모두 167수다. 송설당이 한시를 지은 시기는 선조의 설원을 성취한 때(1901년)를 전후해 1912년 송설당을 건립하고 1922년 문집을 발간하기 이전이며 시적 공간은 주로 나라를 잃은 대한민국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송설당 한시에는 현실을 직시해 인간답게 사는 일로부터 나라를 회복하고 세계의 평화를 염원했던 애민, 애국, 우국의 간절한 정회가 담겼다. 한마디로 시문에 능해 억지로 꾸미지 않아도 절로 뛰어난 글을 이뤘고, 굳은 절조와 장부다운 기상이 있어 우국의 정서를 시에 담기도 했다. 또한 우아하고 속기가 없는 시를 썼다. 송설당은 배우지 않으면 옷걸친 마소가 된다고 항상 경계했으며, 평소에도 독서에 열중했음을 한시‘월야’에서 알 수 있다. 특히 최송설당은 교육은 인격을 닦는 바탕임을 강조하는데, 이한모가 돌 다듬는 것을 보고 쓴 ‘관이한모치석(觀李漢模治石)’이라는 한시에서는 갈고 닦아 빛을 낸다는 절차탁마가 곧 학문의 과정이며, 절차탁마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군자가 되는데 있다고 노래했다. 또 송설당은 인간 존재의 가치는 유용한 존재가 되는데 있음을 ‘송(松)’이라는 한시에서 은유했다. 소나무가 자라 마룻대와 돌보감이 될 때까지 지금 키우는 사람은 늙어서 못 보리라는 것이다. 곧 사람의 교육은 인재를 양성하되, 그 인재는 다음 세대의 주역들이라고 노래했다.

최송설당 사후 김천고보는 시련을 겪으면서도 발전을 거듭했다. 1942년 10월에 터진 조선어학회 사건에 제2대 교장 국어학자 정열모가 연루되자 학교는 강제 폐교됐다. 김천고보를 빼앗긴 송설당교육재단은 공립 김천중학교의 후원단체로 전락했다가 1953년에야 학교를 되찾았다. 김천의 정신으로 자리잡고 있는 김천고보를 위해서 모든 것을 희사한 최송설당은 한국여성사 또는 조선문화사의 첫머리를 장식하기에 충분하다.

/윤희정기자 hjyun@kbmaeil.com

<자료제공=경북여성정책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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