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② 변화하고 발전하는 국수

얼갈이배추나 배추를 넣고 끓인 제물국시.

시집오는 신부가 소복을 입었다. 시댁에 상이 있었다. 혼사를 앞두고 시어머니 되실 분이 돌아가셨다. 소복으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경북 안동 ‘경당종택’ 종부 권순 씨 이야기다. ‘봉제사접빈객(奉祭祀接賓客)’. 제사 모시고 손님맞이 하는 일. 그 중심은 음식이다. 그로부터 60년. 온전히 종부 권순 씨가 도맡았다.

 

귀한 제사에는 반드시 국수가 있었다. 국수가 없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번거롭고 귀찮기 때문이다. 국수가 하찮은 음식이 되면서 제사국수는 사라졌다. “별 대단한 음식도 아닌데 만들기 번거롭다”고 여기면서 제사국수는 사라졌다.

◇ 스물다섯에 시집와서 60년, 국수를 썰다

집안에 여자가 없었다. 시고모가 부엌일을 하고 있었다. 소복을 입은 채로 시집살이를 시작했다. 신랑은 군인이었다. 결혼을 위한 휴가 며칠이 지나고 신랑은 군대로 돌아갔다.

스물다섯 살 신부는 이제 여든을 넘겼다. 경당 장흥효(1564~1633년)의 ‘경당종택’에서 60년 가까운 세월동안 안살림을 챙겼다. 제사와 손님맞이는 일상사였다. 끊임없이 이어진 제사, 손님맞이를 치러냈다. 누구나 그렇게 하는 줄 알고 해냈다.

시집오기 전, 친정 어른들이 말씀하셨다. “시어머니도 돌아가시고 그 집안에 여자라곤 아무도 없다. 시집가면 이제 부엌일이나 집안일을 네가 도맡아야 한다.” 그러겠노라고 대답했다.

며느리가 시집 살림살이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다. 친정 어른들은 권순 씨의 대답을 ‘결혼에 대한 응낙’으로 받아들였다.

줄이고 줄인 제사가 열 번을 넘긴다. ‘경당종택’의 안살림이 얼마나 무거운지 그때는 몰랐다. 60년간, 한 달에도 몇 번씩 홍두깨로 반죽을 밀고 ‘국시’를 썰었다. 손님맞이에는 늘 국시가 뒤따랐다.

 

안동국시는 얇고 가는 면발이 특징이다.
안동국시는 얇고 가는 면발이 특징이다.

◇ 국수는 귀한 음식이니 함부로 내놓지 마라

세종4년(1422년) 5월17일(음력), ‘조선왕조실록’ 기록. 국왕 세종이 주재하는 어전회의의 대화 내용이다. 논의 주제는 태상왕 태종의 수륙재에 관한 것이다. 제목은 ‘수륙재의 인원을 정하다’이다. 7일 전인 5월10일 태종이 승하했다. 예조에서 세종에게 고한다. 내용은 간단하다.

“예조에서 계하기를, ‘태상왕의 수륙재(水陸齋)에 종친과 본조의 관원은 모두 전일에 정한 숫자에 의하고, (중략) 대언(代言)과 속고치[速古赤] 외에는 반상(飯床)을 사용하지 아니하고, 반상에는 다섯 그릇에 불과할 것이요, 진전(眞殿)과 불전(佛前) 및 승려 대접 이외에는 만두(饅頭), 면, 병(餠) 등의 사치한 음식은 일체 금단하소서.’ 하니, 그대로 따랐다. 초재(初齋)를 올릴 때에 거의 수백 명이나 모였으므로, 이러한 계가 있는 것이었다.”

태상왕 태종의 수륙재 참석자와 음식의 규모를 줄이자는 것이다. ‘진전’은 태상왕의 제단이다. 면은 국수, 병은 떡이다. 만두, 국수, 떡 등은 귀한 음식이었다. 태상왕의 제단, 불상, 승려들에게만 국수를 내놓고 고급 관리들에게도 국수를 내놓지 말자고 말한다. 세종은 예조의 의견을 따른다.

세종에게 태종은 아버지이자 멘토다. 삼남이었던 자신을 왕위에 올린 이다. 태상왕 태종의 수륙재는 세종으로서는 무엇보다 귀하게 받들어야 할 제사다. ‘밥상을 받는 이의 음식도 다섯 그릇이고’ 그나마 국수 등 귀한 음식은 뺐다. 국수는 돌아가신 태종, 부처님 앞, 수륙재 주관 승려의 상에만 놓자는 것이다.

귀한 제사에는 반드시 국수가 있었다. 국수가 없어진 이유는 간단하다. 번거롭고 귀찮기 때문이다. 국수가 하찮은 음식이 되면서 제사국수는 사라졌다. “별 대단한 음식도 아닌데 만들기 번거롭다”고 여기면서 제사국수는 사라졌다.

경북 안동에는 지금도 ‘국수 제사’가 남아 있다. 국수 제사는 국수를 밥 대신 내놓는 제사가 아니다. ‘밥과 더불어 국수도’ 차리는 제사다. 국수는 밥 대신이 아니다. 밥이 있지만 별도로 귀한 국수를 내놓는다. 국수를 밥 대신의 식사로 여기는 것은 우리 시대의 생각일 뿐이다.

“내가 차릴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최대한의 정성을 모아서 음식을 차린다”는 것이 바로 제사상을 차리는 원칙이다. 국수는 귀한 음식이다. 빠트릴 수 없다. 태종의 수륙재도 마찬가지다. ‘형편상’ 몇몇 밥상을 제외하고는 빼자는 것이다.

 

부추김치와 깻잎절임, 그리고 건진국시로 차려진 먹음직스런 상차림.
부추김치와 깻잎절임, 그리고 건진국시로 차려진 먹음직스런 상차림.

◇ 음식, 반가에서 반가로 이어지다

‘경당종택’의 종부 권순 씨는 영양 입암 출신이다. 친정이 산택재(山澤齋) 권태시(1635~1719년) 집안이다. 종가(宗家)는 운명이다. 종가에 태어나서 종가로 시집을 왔다. 음식 장만은 시집살이의 주요 덕목이다. 그 살림이 얼마나 무거운지는 아무도 모른다.

산택재는 아버지 번곡 권창업(1600~1663년)에게 수학했다. 번곡은 경당 장흥효의 문인이다. 기록에는 8세에 번곡이 경당의 문하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권순 씨의 인연은 이미 윗대 산택재, 번곡, 경당으로 이어져 있었다.

경당 장흥효는 학봉 김성일(1538~1593년)의 문하다. 퇴계 이황(1501~1570년)~학봉 김성일~경당 장흥효로 학통은 이어진다.

석계 이시명(1590~1674년)은 경당의 문인이자 사위다. 경당은 무남독녀 외동딸 장계향을 제자 석계에게 시집보냈다.

장계향(1598~1680년)은 ‘음식디미방’을 남겼다. 1670년 무렵 쓴 책이다. 권순 씨의 음식은 멀리 장계향의 음식, ‘음식디미방’과 맞닿아 있다.

‘경당종택’은 장계향의 친정이다. 장계향의 친정어머니 권 씨는 경북 봉화 출신이다. ‘음식디미방’에는 ‘맛질방문’이 있다. ‘맛질’은 봉화의 지명이다. ‘맛질방문’은 ‘맛질, 봉화의 음식 만드는 법’이다. 장계향의 ‘음식디미방’에는 친정어머니의 봉화 음식(맛질방문), 친정인 경북 예안(안동)의 음식 그리고 시댁인 석계 이시명 집안의 음식이 고루 녹아 있다.

 

서울 압구정동 ‘안동국시’의 메뉴판. 우리밀, 건진, 안동 등 3종류의 국수가 있다.
서울 압구정동 ‘안동국시’의 메뉴판. 우리밀, 건진, 안동 등 3종류의 국수가 있다.

석계는 경북 영해(영덕)에서 태어났다. 장계향이 혼례를 치르고 시집살이를 시작한 곳도 영해였다. 석계 집안은 영양으로 세거지를 옮긴 후에도 영해로 돌아와서 긴 시간을 보냈다.

‘음식디미방’에는 봉화, 안동, 영덕, 영양의 반가음식들이 골고루 녹아 있다.

장계향과 권순 씨는 친정과 시댁이 묘하게 엇갈린다. 장계향은 안동이 친정이고 시가가 영양 석보면이다. 12대 종부 권순 씨의 친정은 영양 입암이고 시댁은 안동 ‘경당종택’이다. 영양 석보면과 입암면은 나란히 붙어 있다.

11대를 지나서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권순 씨는 시집 온 후 쭉 국수를 밀고 썰었다. 국수가 주식은 아니다. 때로는 마치 주식인양 국수를 내놓았다. 종손 장성진 씨도 국수를 좋아한다. 하루 세끼 국수를 내놓아도 싫다하지 않는다. 집안의 대소사가 적지 않다. 경당의 종손이다. 제사라도 있을라치면 수십, 수백 명이 모여든다. 이들에게 ‘안동국시’를 내놓는다.

한때는 안동 장 씨 문중뿐만 아니라 안동, 안동 인근의 크고 작은 집안에서 죄다 경당의 불천위 제사에 모여들었다. 모든 행사에 국수는 필수다. 종부는 매번 수십, 수백 그릇의 국수를 마련했다. 2016년 초, 국수를 접었다. 몸이 좋지 않았다. 더 이상 국수를 만들 수 없었다.

‘음식디미방’에는 몇 가지 국수가 등장한다. 계란으로 반죽하는 난면과 메밀국수, 녹말국수 등이 등장한다. 국수는 ‘음식디미방’의 주요 내용이다.

 

고운 국시가락이 방문객을 매혹하는 서울 ‘봉화묵집’.
고운 국시가락이 방문객을 매혹하는 서울 ‘봉화묵집’.

◇ 삼성, 국수로 시작하다

별표국수? 새로운 국수 브랜든가?, 라고 되물을 법하다. 그렇지 않다. 80년 전에 있었던 국수 브랜드다.

‘별표국수’는 모르더라도 ‘삼성상회’는 널리 알려졌다. 오늘날 삼성 그룹의 모체다.

‘삼성상회’는 1938년 대구에서 시작했다. 삼성그룹의 시작이 대구 ‘삼성상회’였고 ‘삼성상회’의 주요 ‘계열사’가 바로 ‘별표국수’, 국수 공장이다.

삼성의 고 이병철 회장은 경남 의령 출신이다. 김해평야 생산 쌀을 바탕으로 미곡업도 오래 운영했다. 기반은 고향 의령과 가까운 진주였다. 대구와는 거리가 멀다. 왜 삼성을 대구에서 시작한 기업으로 여길까?

‘삼성상회’ 때문이다.

 

서울 ‘봉화묵집’에선 여름 별미인 건진국수와 조밥이 인기다.
서울 ‘봉화묵집’에선 여름 별미인 건진국수와 조밥이 인기다.

삼성상회는 대구 근처에서 사과 등 청과물과 포항의 건어물을 사들여 만주와 북경에 내다 팔았다. 여기에 하나 더 새로운 사업이 추가됐다. 바로 국수사업이었다. 이병철은 제분기와 제면기를 가져다 놓고 국수를 만들어 팔았다. 글로벌기업 삼성의 첫 출발은 과일과 국수 사업이었던 셈이다.

국수 브랜드는 ‘별표’였다. 3개의 별이 선명하게 새겨진 ‘삼성별표 국수’ 상표다. 이병철은 당시 3개의 별을 의미하는 삼성을 ‘三星’이란 한자로 쓴 로고를 썼는데 이는 1950년대까지 널리 사용됐다.

그가 국수사업에 나선 건, 일제의 식량 수탈이 심해지면서 식량이 턱없이 부족하다는데 착안한 것이다. 국수는 히트를 쳤다. 한 다발에 10전짜리 국수를 60다발씩 포장한 상자가 하루에만 100개 이상 팔려 나갔다. 주요 고객은 안동과 봉화에서 온 도매상들이었다.

‘삼성상회’는 수출이 주력이었다. 대구 인근의 사과와 포항의 건어물을 만주, 북경으로 팔았다. 국수사업은 ‘내수용’이었다. 제분기, 제면기만 이야기했지만 아마도 밀은 대부분 만주 등에서 수입한 것이었으리라.

국내의 밀 생산은 한정적이었고 만주 일대 등 중국산 밀이 부산 언저리 구포항을 통하여 일본으로 수출되던 시기다. 대구는 만주와 구포를 잇는 철도의 중간에 있는 도시다. 과일, 건어물을 수출, 수입하기에 모두 편했다.

재미있는 것은 기사의 마지막 부분이다.

‘주요 고객은 안동과 봉화에서 온 도매상들이었다’.

이 내용에 대한 추가적인 설명은 없다. 위 기사는 고 이병철 회장의 자서전 ‘호암자전’을 바탕으로 작성한 내용이다. 이병철 회장의 기억 속에 남은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런데 콕 집어서 ‘안동’ ‘봉화’의 도매상이라고 했다.

대구에서 내수용으로 시작한 사업이 국수 사업이고, 소비처 중 주요 거점이 바로 안동, 봉화 등이었다.

안동은 장계향의 친정이자 지금 경당종택이 있는 곳이다. 종부 권순 씨가 살고 있다. 봉화는 장계향의 외가다. ‘음식디미방’의 ‘맛질방문’이 바로 ‘어머니 고향 봉화의 음식 만드는 법’이다.

국수는 얽히고설킨다. 달라진다. 국수는 변하고 발전한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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