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광해의 경북의 멋과 맛을 찾아서
④ 육개장의 붉은 색깔이 귀신을 쫓는다?

육개장에는 대파, 마늘, 고추기름 등 양념이 많이 들어간다.

대구, 경북은 육개장으로 유명하다. 흔히 ‘대구 육개장’이라고 말한다.

육개장은 언제, 어떻게 생겼을까?

“경부철도가 뚫린 후 사람들이 대구의 여러 시장에 모여들기 시작했고 대구의 시장터에서 육개장을 팔기 시작했다.” 이게 다수설이다. 수긍이 가는 이야기다. 질문을 더한다. “그런데 왜 육개장에는 벌건 고추기름을 사용할까?”

 

국수가 불가능하고 육개장이 없던 시절에는 어떤 음식을 내놓았을까? 개장국이었다.

‘개장국’은 ‘된장 푼 물에 개고기 넣고 끓인 국’이다.

육개장에 고춧가루, 억센 대파, 마늘 등을 많이 넣는 것도 개장국의 흔적이다.

답은 “붉은 색은 벽사(<8F9F>邪)의 의미를 지니고 있다. 삿된 귀신을 쫓기 위하여 붉은 고추기름을 사용한다”이다. 식당에 느닷없는 삿된 귀신? 이상하다. 이 표현은 틀렸다. 가정도 마찬가지. 요즘 초상집에서 가장 편하게 내놓는 것이 육개장이다.

‘초상’은 돌아가신 조상의 혼백을 모시는 행사다. 귀신을 쫓는 것이 아니라 잘 모셨다가 잘 보내드리는 행사다. “붉은 색으로 삿된 귀신을 쫓는다?” 아무리 재 봐도 엉터리다.

제사를 모실 때 지방(紙榜)을 쓴다. 벼슬을 하지 않은 경우엔 ‘현고학생부군신위(顯考學生府君神位)’다.

‘현고’는 돌아가신 아버지다. ‘신위(神位)’는 신(神), 곧 돌아가신 조상이 앉아 있는 자리다. 조상을 모신 자리다. 지방을 써서 조상을 모시고 절을 하는 판에 육개장의 붉은 색으로 귀신을 쫓는다? 이상하지 않은가?

대구는 분지(盆地)라서 춥다. 그래서 고춧가루를 많이 쓰고 육개장이 붉은 색이라는 의견도 있다. 이 말도 우습다. 육개장은 대구에서 ‘시장화’한 것이지 대구에서 시작한 것은 아니다. 대구 바깥 지역에도 육개장은 있었다. 육개장은 경상좌도, 오늘날의 경북에서 널리 유행했다. 그중에는 분지가 아닌 곳도 많다.

추운 곳이라서 매운 것을 먹는다면, 평양냉면은 고춧가루 범벅을 할 판이다. 따뜻한 호남의 매운 양념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귀신 쫓기, 분지=맵고 붉은 육개장’은 엉터리다.

 

대구 ‘옛집식당’의 육개장은 따로국밥이다. 대파의 흰 부분을 많이 사용한다.
대구 ‘옛집식당’의 육개장은 따로국밥이다. 대파의 흰 부분을 많이 사용한다.

◇ 육개장, 초상집의 손님맞이 음식이다

초상집에서 음식을 대접하는 나라는 많지 않다. 서양의 경우, 종교의식을 치르고 묘지에 간다. 적절하게 조의를 표하고 끝이다. 밤을 새며 고스톱을 치며 음식, 술을 먹는 나라는 거의 없다. 상가 음식도 천편일률적이다. 육개장과 전이다. 외국인들이 한국의 장례를 보며 참 희한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다.

지금은 굶주림의 시대가 아니다. 여전히 초상이 나면 ‘병원상가’에서라도 육개장 등 음식을 내놓는다. 평소에 보기 힘들었던 전도 나온다. 희한하지 않는가? 왜 전과 육개장일까? ‘봉제사접빈객’의 손님맞이다. 관혼상제의 손님맞이 상차림이 지금도 남은 것이다.

국수가 불가능하고 육개장이 없던 시절에는 어떤 음식을 내놓았을까? 개장국[狗醬羹, 구장갱]이었다.

‘개장국’은 ‘개[狗]’+‘장(醬)’+‘국[羹]’이다. ‘된장 푼 물에 개고기 넣고 끓인 국’이다.

육개장에 고춧가루, 억센 대파, 마늘 등을 많이 넣는 것도 개장국의 흔적이다. 개장국은 고기 비린내가 심하다. 도축기술도 좋지 않았다. 고기 냄새를 지우려고 고춧가루, 마늘, 대파 등을 많이 넣었다. 개장국의 대타인 육개장에 매운 양념을 많이 넣는 이유다.

관혼상제의 손님맞이에 많은 공력을 들였던 지역이다. 손님맞이의 주요 품목은 음식이다. 20세기 초반, 육개장은 이미 대구와 경북 전역에서 시작되었다. 개장국의 대체 음식으로.

 

육개장 그릇 옆에 고추와 마늘 다진 것이 있다.
육개장 그릇 옆에 고추와 마늘 다진 것이 있다.

◇ 사람은 육축(六畜)을 먹는다

유교에서는 사람이 6가지 가축, 육축(六畜)을 먹도록 규정했다. 육축은 소, 말, 돼지, 개, 양, 닭이다.

소는 금육(禁肉)이다. 소는 농사의 주요 도구였다. 식용으로 소를 불법 도축하는 것은 중대범죄였다. 왕족이 불법 도축으로 귀양을 갔다. ‘불법도살 초범’도 곤장을 때리고 유배를 보냈다. 몰수한 죄인의 재산을 신고자에게 넘겨줬다.

농사도구인 소를 잡는 것은 식량 생산에 차질을 주는 주요범죄였다. 18세기 이후 농작물 생산량이 늘어나고 소의 생산도 늘어났다. 쇠고기 식용은 비교적 흔해진다. 영조대왕 무렵에는 엄격했던 ‘금육’이 정조대왕 시절에는 얼마간 느슨해진다. 그래도 쇠고기 식육은 쉽지 않았다.

말은 교통, 통신의 주요 도구다. 귀하게 여기고 먹지는 않았다. 돼지는 먹이를 두고 인간과 다툰다. 사람이 먹는 식재료를 먹는다. 사시사철 먹이 준비가 어렵다. 식용 이외에는 사용처도 없다. 그저 먹고 살만 찐다.

한반도는 돼지 키우기에 적합한 풍토도 아니다. 돼지는 덥고 습기가 높은 곳에서 잘 자란다. 한반도는 비교적 춥고 건조하다. 양은 한반도에서 잘 자라지 않는다. 대관령목장의 양은 관광용이다. 닭은 개체가 너무 작다. 가족들이 먹기 적절한 양이지 행사나 주막에서 다루기는 너무 작다.

만만한 게 개다. 인간과 먹이를 다투지도 않는다. 평소에는 집 지킴이로 적절하다. 산에서 늑대가 출몰하던 시기다. 외진 산길을 가려면 넉넉한 동반자가 된다. 복날 개를 먹는 것은 오랜 풍습이었다. 크기도 적절하다. 주막에서 다루기 좋은 크기다.

정조대왕 즉위 1년(1777년) 7월28일(음력), ‘정조 암살미수 사건’이 일어난다. 영화 ‘역린’은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든 것이다. 범인들의 공초문(供招文, 수사기록) 중 일부다.

“7월 28일 밤에 ‘대궐 밖의 개 잡는 집’에 이르러 강용휘가 전흥문에게 3문(文)의 돈을 주어 ‘개장국(狗醬)’을 함께 사 먹고 대궐 안으로 숨어들어가 별감 강계창과 나인[內人]월혜를 불러, 귀에 대고 한참 동안 속삭였다.”

 

원래 육개장은 황소고기 양지살로 끓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황소고기가 오래 끓이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맛도 깊다. 사진 속 식당은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원래 육개장은 황소고기 양지살로 끓였다는 이야기도 전해진다. 황소고기가 오래 끓이기에 적절하기 때문이다. 맛도 깊다. 사진 속 식당은 지금은 영업을 하지 않는다.

이야기는 이어진다. “암살시도가 실패한 후, 범인 전흥문은 흥원문(경희궁)으로 빠져나와 달아났고, 강용휘는 금천교 방향(창덕궁)으로 달아난 후, 이튿날 공범 홍상범 등과 ‘개 잡는 집’에 다시 모였다.”

앞의 ‘대궐 밖 개 잡는 집’과 이튿날 모인 ‘개 잡는 집’은 다른 곳이다.

18세기 후반 한양에는 군데군데 ‘개 잡는 집’과 밤늦게 문을 여는 ‘개장국’ 파는 집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개고기는 일상적으로 먹는 상식(尙食)이었다.

18세기 후반까지도 개장국 파는 주막들은 흔했다. 왜 일제강점기 대구의 시장에서는 개장국이 아니라 육개장을 팔았을까?

◇ 중국 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더라

육개장은 ‘육(肉)+개장국’이다. ‘육’은 쇠고기다. 쇠고기로 개장국 같이 끓인 음식이 육개장이다. 대구가 경부선의 주요 기차역이 되었다. 교통요지다. 시장이 선다. 많은 사람들이 대구 시장에 모여들었다. 사람이 모이면 식당이 필요하다. 시장 상인이나 시장 손님 모두 끼니는 이어야 한다. 식당 손님들 중에는 개고기를 피하는 이들도 있다.

주막의 주요 메뉴는 개장국이었다. 개장국이 1910년대 대구의 시장에서 육개장으로 바뀐다. 왜 갑자기 개고기를 피하는 사람들이 생겼을까?

‘개고기’에 대한 다른 내용, 시각의 기록이다. 하나는 ‘개고기 식용’이다. 또 다른 하나는 ‘개고기 식용은 야만’이라 여기는 내용이다.

 

육개장에 사용하는 고기는 찢어야 한다. 써는 고기와 찢는 고기는 맛이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육개장에 사용하는 고기는 찢어야 한다. 써는 고기와 찢는 고기는 맛이 다르다는 주장도 있다.

“연경(북경)사람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을뿐더러 개가 죽으면 땅에 묻어준다. 심상규(1756~1838년)가 북경에 갔을 때 경일(庚日, 복날)을 맞아 개고기를 삶아 올리도록 하였다. 북경사람들이 크게 놀라면서 이상히 여기고 팔지 않았다. 심상규가 그릇을 빌려 삶았는데 그 그릇을 모조리 내다버렸다. (황해도)장단의 이종성(1692~1759년)은 잔치에 갔다가 개장국을 보고 먹지 않고 돌아와 말하기를, ‘손님을 접대하는 음식이 아니다’라고 하였다. 두 사람이 달랐다.”

이유원(1814~1888년)의 ‘임하필기’에 나오는 내용이다. 필자 이유원은 조선 말기의 문신이다. 고종 때 영의정을 지냈다. 그가 듣고 보고, 기록한 내용들은 19세기 후반, 고급 관리의 시각으로 본 것들이다.

심상규는 이유원보다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정조대왕의 초계문신이었고 영의정을 지냈던 인물이다. 심상규가 성절사로 북경에 간 것은 1812년이다.

이종성은 이유원, 심상규보다 더 앞선 시대의 사람이다. 이종성은 이항복의 5세손으로 영조대왕 시절 영의정을 지냈다.

이종성과 심상규의 ‘개고기 식용’에 대한 입장은 정반대다. 흥미롭다.

17세기 중반 조선은 청나라에 처절하게 당한다. 정묘호란(1627년)과 병자호란(1636~1637년)을 겪으며 조선은 견디지 못할 치욕과 약탈을 당한다.

숱한 이들이 포로로 끌려가고 노예가 되었다. 삼전도의 비와 ‘환향녀(還鄕女)’도 이때 생겼다. 원한이 깊었다. 조선의 사대부들은 내심 ‘오랑캐 청나라’를 증오, 멸시했다.

시간이 흘렀다. 중국으로 간 조선사신단들은 발전한 서양의 문물을 중국, 북경에서 본다. 북학파도 생긴다. 중국, 청나라에 대한 호기심, 호감이 생긴다.

 

능이버섯 등을 많이 넣은 변형 육개장.
능이버섯 등을 많이 넣은 변형 육개장.

 

청나라는 개고기 식용을 피한다. 이유는 두 가지. 하나는 개의 지위(?) 때문이다. 청나라를 세운 만주족은 수렵, 기마민족이다. 개는 사냥의 동반자이자 목숨을 지켜주는 동료다. 농경민족의 개와는 지위가 다르다. 동반자, 동료를 먹을 수는 없다. 청나라가 개고기 식용을 피한 이유다.

청나라(후금)를 세운 이는 누르하치(Nurhachi, 努爾哈赤, 1559~1626년)다. 개는 누르하치의 생명을 두 번이나 구해주었다고 전해진다. 건국 태조의 목숨을 두 번이나 구한 개를 식용할 수는 없다. 통치자 만주족들이 개를 먹지 않자 피지배자인 한족들도 따른다.

중국을 드나들던 조선의 사대부 중에는 ‘문명개화된 중국’이 개고기를 먹지 않는 것을 본다. 이를 따른다. ‘개고기 비식용 파’가 생긴다. 1910년대 한반도에는 ‘개고기 식용vs비식용’이 나뉘어 있었다.

1712년 사신단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문인, 화가 노가재 김창업(1658~1721년)은 ‘연행일기’에서 “평안도 가산의 가평관에서 이민족(오랑캐)에게 개고기와 소주를 대접받았다”고 했다. 1791년 사은사 일행으로 청나라를 다녀온 문인 김정중(1742~?)은 ‘연행록’에서 “중국인들은 비둘기, 오리, 거위 등을 먹지만 개고기는 먹지 않는다”고 했다.

조선 후기 이미 개고기 식용, 비식용은 뒤섞였다. 일제강점기인 1910년대 대구의 시장에도 개고기를 피하는 이가 있었다. 쇠고기도 비교적 흔해지고 금육도 풀렸다.

육개장은 개장국 대용품이다. 주막에서 팔던 개장국을 닮은, 쇠고기 국이다.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맛칼럼니스트 황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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