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여인들 ⑨

▲ 소지왕은 일흔 가까운 나이에 열여섯 살 소녀 벽화와 사랑에 빠진다. 견딜 수 없는 연애 감정에 고민하는 소지왕의 표정이 심각하다.  /삽화 이찬욱
▲ 소지왕은 일흔 가까운 나이에 열여섯 살 소녀 벽화와 사랑에 빠진다. 견딜 수 없는 연애 감정에 고민하는 소지왕의 표정이 심각하다. /삽화 이찬욱

당연한 이야기지만 지금으로부터 최소 1천 년 전을 살았던 신라 사람들도 21세기 우리와 똑같이 사랑을 하고 결혼도 했다.

까마득한 과거 서라벌에도 비극적인 사랑 때문에 가슴 아파하던 청년이 있었고, 매력적인 사내와의 결혼을 꿈꾸며 노심초사하던 처녀가 있었다.

‘삼국유사’ ‘삼국사기’ ‘화랑세기’ 등 신라의 역사를 기록한 고문헌을 읽다보면 드물지 않게 ‘러브 스토리’가 등장하는 걸 알 수 있다. 어떤 것은 재미있고 웃음을 부르는 반면, 또 다른 어떤 것들은 슬프고 애절하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신라의 여인들도 오늘날의 여성처럼 이루어지기 힘든 사랑에 애태우고, 근사한 남성과의 화려하고 성대한 결혼식을 꿈꾸곤 했다.

그중 일흔 살의 왕이 사랑했던 열여섯 살 소녀의 이야기와 ‘꿈을 거래한 덕분’에 왕비가 된 김유신의 여동생 이야기가 우리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 회갑 넘긴 소지왕, 16세 소녀 벽화를 만나다

“통치하는 기간 내내 백성의 삶을 가까이서 살폈고, 무엇보다 민생을 중시했다”고 평가받는 소지왕(재위 479~500).

자비왕의 아들로 태어난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부터 부모를 극진히 모시고 겸손한 태도를 가졌기에 많은 이들의 칭송을 받았다.

재위 기간에도 고구려와 일본의 침략을 효과적으로 방어해 나라가 곤경에 빠지는 걸 막았고, 서라벌 곳곳에 성을 쌓아 국방을 튼튼히 했다.

행정 시스템을 개선하고, 백성의 결속을 다짐으로써 정치력을 극대화시킨 것도 눈길을 끈다. 신라에서 최초로 역참(驛站)을 설치하고 관도(官道·국가가 관리하는 길)를 보수한 것도 소지왕의 업적이다.

여기에 더해 사람들이 굶주린다는 소식을 들으면 왕궁의 곳간을 기꺼이 열었고, 고생하는 군사들을 직접 찾아 따뜻한 겨울옷을 나눠주기도 했으며, 고통 받는 고아와 홀로 사는 노인들을 위로했다니 분명 자애롭고 좋은 왕이었다.

그런 소지왕이 생애 단 한 번 ‘좋지 못한 소문’에 휩싸인 적이 있으니, 열여섯 소녀에게 사랑의 감정을 느낀 것이다. ‘삼국사기’에 실린 관련 내용을 요약하면 아래와 같다.

“회갑을 넘겨 일흔이 가까워오던 소지왕이 신라의 북쪽 국경마을 날이군(捺已郡·현재의 영주 지역)으로 순시를 나갔다. 왕을 맞이한 그 마을 유력자가 자신의 딸 벽화(碧花)를 치장해 바쳤다. 겨우 16세 소녀였다. 받을 수 없다고 거부하며 돌아왔지만 얼핏 본 소녀의 얼굴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손녀 또래의 여자와 사랑에 빠진 것이다.

이후 소지왕은 누구도 자신을 알아보지 못하게 변복(變服)하고 날이군을 찾아 여러 차례 벽화와 통정했다. ‘왕이 신중하지 못하게 처신한다’는 고약한 풍문이 떠돌았다. 그러나 남들의 손가락질도 그의 정열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벽화를 왕궁으로 불러들인 소지왕은 그녀와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기도 했다.”

때때로 사랑은 노인을 ‘철없는 소년’으로 만들어 버리기도 한다. 보편적이지 않지만 스스로 제어할 수 없고, 견딜 수도 없는 연애의 감정은 1천500년 전 신라에도 분명 존재했던 것이다.

 

▲ 신라에선 ‘꿈’과 ‘별자리’로 미래를 점치기도 했다. 진지하게 꿈 이야기를 나누는 문희와 보희 자매를 몽환적으로 그렸다.   /삽화 이찬욱
▲ 신라에선 ‘꿈’과 ‘별자리’로 미래를 점치기도 했다. 진지하게 꿈 이야기를 나누는 문희와 보희 자매를 몽환적으로 그렸다. /삽화 이찬욱

◆ 문희, 비단을 주고 언니의 꿈을 사다

앞의 에피소드에선 남성(소지왕)이 적극적이었다면, 이번에 소개할 이야기는 ‘능동적인 여성’이 주인공이다. 이미 많은 독자들이 알고 있겠지만 ‘삼국유사’에 기록된 걸 간략하게 소개한다.

“신라의 장군 김유신에겐 보희와 문희라는 두 명의 여동생이 있었다. 어느 날 언니 보희가 부끄러운 표정으로 조심스럽게 자신의 꿈 이야기를 문희에게 들려줬다. ‘서라벌 높은 산에 올라가 소변을 보았는데 시내가 온통 물바다가 돼버렸다’는. 당시 신라에선 꿈과 별자리로 미래를 점치곤 했다. 그 꿈이 상서로운 것임을 눈치 챈 문희가 비단 한 필을 주고 언니의 꿈을 샀다.

며칠 후 김유신의 집에 풍채 좋은 김춘추라는 청년이 찾아왔다. 사소한 사고로 옷이 찢어진 김춘추는 보희를 대신해 바느질을 해주러 온 문희를 눈여겨보았다. 오래지 않아 사랑에 빠진 문희와 김춘추는 밀애를 시작했고, 연이어 문희가 임신을 함으로써 김춘추와 혼인하게 된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춘추는 후에 태종무열왕(재위 654~661)이 되는 인물이다.”

겨우 비단 한 필로 ‘왕비의 자리’를 차지하게 되는 문희의 일화는 어떤 측면에선 농담처럼 재미있고, 또 달리 보자면 낭만적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 ‘러브 스토리’를 당시 신라의 정치·사회적 현실이라는 관점에서 해석하는 역사학자들도 다수다.

경상북도문화재연구원이 발행한 ‘신라의 사회 구조와 신분제’에선 김춘추와 문희의 결혼 이면에 자리한 김유신의 야심(野心)을 이렇게 쓰고 있다.

“김유신은 누이동생인 문희를 김춘추와 혼인시켰다. 또 자기 자신도 김춘추의 딸인 지소부인(智炤夫人)과 혼인하여 김춘추 가문과 중복적인 인척 관계를 맺었다.

이는 진골로서 그 가문의 위치를 확고히 하고자 하는 김유신의 의지가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런 과정을 통해 김유신 집안은 신라 왕실 안에서 차지하는 지위를 굳히고, 진골로서 신분적 위치도 확고히 할 수 있었다.”

둘의 결합은 문희가 우연히 언니의 꿈을 사서 얻은 행운이거나, 김춘추의 애정 공세가 만들어낸 극적인 드라마가 아니라 엄격한 신분제 사회였던 신라에서 자기 가문의 권력을 강화하려 한 김유신의 계략에 의한 것이었을까?

지금도 이 질문에 정확한 답변을 내놓을 사람은 없다. 당시로 돌아가 문희와 김춘추, 김유신에게 직접 물어보고 그들의 대답을 들어보기 전엔. 다만 이것 하나는 분명해 보인다. 신라 시대나 오늘날이나 사랑을 차지하고 결혼에 이르기 위해선 무엇보다 ‘적극적인 능동성’이 필요하다는 것 말이다.

 

▲ 문희의 오빠인 김유신의 무덤은 경주시 충효동에 위치했다. 비석엔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新羅 太大角干 金庾信 墓)’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 문희의 오빠인 김유신의 무덤은 경주시 충효동에 위치했다. 비석엔 ‘신라 태대각간 김유신 묘(新羅 太大角干 金庾信 墓)’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학계로부터 “음탕한 동시에 무능력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는 신라의 진성여왕. 시인 김선향이 “권력자가 아닌 여성으로서 가졌을 진성여왕의 고뇌를 함께 살펴야 한다”는 내용을 담은 시 한 편을 본지에 보내왔다. 역사 인물에 대한 문화적 해석을 독자들과 공유한다는 차원에서 이를 게재한다.

진성여왕을 위한 변명

경문왕과 문의왕후의 딸

너는 숨 막히는 아름다움이다

음란과 방탕, 신라 멸망의 원흉

너에게 찍힌 낙인을 지운다

오라버니 정강왕의 유언으로 너를 기억한다

만(曼)은 총명하고 민첩하여

골상(骨相)이 장부와 같으니

옛날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처럼

그녀를 왕으로 받들라

즉위 다음해 숙부이자 애인 위홍이 죽자

너는 큰 슬픔 속에서 헤어나지 못한다

밤낮으로 남자들에 탐닉한다

이미 신라는 바람 앞의 등불

서라벌에 흉년이 들고 해가 뜨지 않는다

근년에 백성이 굶주리고 도적이 일어나는데

이는 내가 덕이 없는 까닭이다

이제 숨어 있는 어진 자 요(嶢)에게 왕위를 물려주노라

너는 비단옷을 버리고 탐스러운 머릴 자른다

여왕이 아닌 여자가 되어

홀연히 순례를 떠난 너는

그해 겨울 영원히 세상을 버린다

그 무엇도 아닌 본래의 너로 돌아간다.

 

▲ 소지왕은 일흔 가까운 나이에 열여섯 살 소녀 벽화와 사랑에 빠진다. 견딜 수 없는 연애 감정에 고민하는 소지왕의 표정이 심각하다.  /삽화 이찬욱

◆ 시를 쓴 김선향 시인은…

1966년 충남 논산에서 태어나 충남대학교 국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다.

2005년 문학계간지 ‘실천문학’ 신인상에 당선된 후 창작 활동을 본격화했다.

2016년 한국사회에서 여성으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지를 문학적으로 탐구한 시집 ‘여자의 정면’을 출간해 화제를 모았다.

수원시 다문화센터에서 여성 결혼이민자들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오랫동안 했었고, 시 쓰는 모임 ‘사월’ 동인으로 활동 중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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