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획ㆍ특집
심미적 감성 품은 예술가이자 명철한 과학기술자 ‘선덕여왕’신라의 여인들 ②
홍성식기자  |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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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일 2018.07.05   게재일 201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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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덕여왕은 사람들에게 ‘아름다운 예술 애호가’로 알려졌다. 하지만 단순히 그 모습만이 그녀의 전부였을까?
 

선덕여왕(재위 632∼647)이 남긴 흔적을 찾아 홀로 경주를 찾았던 날은 초여름 소나기와 뜨거운 햇살이 거듭 반복되며 사람을 괴롭혔다.

그러나 6월 말 경주의 풍광은 짜증보다는 감동을 먼저 불러들였다.

국립 경주박물관이 마련한 ‘황룡사 특별전’을 천천히 둘러보고, 여왕이 영면에 든 보문동 선덕여왕릉을 들른 뒤 버스를 타고 경주시 인왕동에 우뚝 선 ‘첨성대(瞻星臺)’를 향했다.

과학기술·천문관측에 큰 관심
삼국사기 ‘총명하고 민첩’ 기록
그림 속 은유·상징 읽어내기도

옛 사람들은 하늘의 별자리가 인간의 운명과 세상의 변화를 예측하고 있다고 믿었다. 그랬기에 반짝이는 달과 별을 관찰하는 것은 ‘세상사의 순리와 역행’을 예언하는 행위와 동일한 의미였다. 첨성대는 바로 이 역할을 수행했다.

고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따르면 첨성대는 선덕여왕 16년(647년)에 만들어졌다.

지금은 국보 31호로 지정된 ‘동양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대’가 남성 왕이 아닌 여성 왕이 지배하던 서라벌에 들어선 것이다.

구조적인 측면은 물론, 미학적인 면에서도 어디 하나 빠지지 않는 첨성대는 선덕여왕이 과학기술과 천문 관측에도 높은 관심을 가진 통치권자였다는 사실을 미루어 짐작하게 해준다.

사실 여러 문헌에 전하는 선덕여왕의 모습은 ‘미모’와 ‘예술적 감수성’에 한정돼 있다는 걸 부정하기 힘들다. 예컨대 아래와 같은 묘사들이다.

  ▲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그림 속에 담긴 상징과 은유를 함께 살필 줄 알았던 선덕여왕.  /삽화 이찬욱  
▲ 눈에 보이는 것만이 아닌 그림 속에 담긴 상징과 은유를 함께 살필 줄 알았던 선덕여왕. /삽화 이찬욱

“용봉(龍鳳·용과 봉황)의 자태와 천일(天日·하늘에 떠있는 태양)의 위의를 가진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 ‘화랑세기(花郞世紀)’가 표현한 선덕여왕.



“성품이 너그러운 동시에 어질고 총명하며 민첩하기까지 하였다.”

-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등장하는 선덕여왕 모습.



그런데, 과연 그것뿐이었을까? 한국학중앙연구원 김창겸의 논문 ‘신라 선덕여왕의 왕위계승에 대한 논의’에는 아래와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선덕여왕이 여성의 입장에서 왕이 되기까지의 어려움을 추정하게 해주는 대목이다.

“선덕여왕의 즉위는 신라 왕위 계승에서 종전에 지켜온 부자 계승원칙을 준수하고자 재위 중인 왕의 자식이라야만 하는 필수적 기본조건인 혈연에 더하여, 반드시 성골(聖骨·부모가 모두 왕의 직계인 신라의 최고 골품)이라야 한다는 골품제 규정을 새롭게 추가로 적용시킨 사례다.”

위의 서술은 선덕여왕이 남성이 아닌 여성이라는 ‘성적인 한계’를 당대의 정치적 지지와 더불어 개인적 능력을 통해 쟁취했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신라의 주류사회가 곧 무너질 ‘골품제 규정’을 그녀를 위해 억지스럽게 적용시킬 필요가 있었을까?

  ▲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인 첨성대는 선덕여왕 통치 시절에 만들어졌다.  
▲ 동양 최고(最古)의 천문대인 첨성대는 선덕여왕 통치 시절에 만들어졌다.

◆ ‘예술 애호가’에서 멈추지 않았던 선덕여왕

우리의 인식 속에 고착된 또 하나 ‘선덕여왕의 신화’는 예술 애호가로서의 모습이다.

한 점의 그림도 허투루 보지 않고 그 작품 속에 숨겨진 은유와 상징을 읽어내는 선덕여왕의 예술적 심미안은 ‘삼국유사’에서 아래와 같이 묘사되고 있다.

“당나라 태종이 붉은색, 흰색, 자주색의 모란 그림과 함께 꽃의 씨앗을 신라로 보내왔다. 선덕여왕은 그림을 한참 살피더니 ‘이 꽃은 향기가 없을 것’이라 잘라 말했다. 과연 그랬을까? 신하들은 왕궁에 당나라 왕이 준 씨앗을 심어 꽃이 필 때까지 기다렸다. 마침내 꽃이 만개했다. 여왕의 말처럼 꽃에서는 향기가 나지 않았다.”

앞서 언급한 두 가지 일화를 통해 선덕여왕은 그저 ‘아름다운 예술 애호가’로만 사람들에게 알려져 있다는 게 세간의 인식이다.

하지만 이에 아쉬움을 표하는 학자들도 이제는 적지 않다. 남성 중심의 역사 서술과 유교적 틀에서 신라 왕조를 연구해온 ‘20세기적 해석의 한계’가 젊은 역사학도의 반발을 부르고 있는 형국.

한국동서비교문학학회가 발행한 김명희의 논문 ‘드라마 선덕여왕에 나타난 여성의 자기실현’은 선덕여왕과 진덕여왕을 “소속 집단을 리드하는 왕이면서 새로운 질서와 가치체계를 가지고 기성사회를 재편하고자 하는 창조적 영웅”이라고 규정한다.

김명희의 주장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문제 해결을 위해 제시되는 다양한 지략과 영민한 전략의 향연”을 펼치는 인물로 선덕여왕을 지목하고 있는 것.

이제 이어지는 논문의 아래 대목을 한 번 읽어보자.

“주인공(선덕여왕)이 여러 난관과 과제를 명철한 슬기와 계략으로 헤쳐 나가며 왕에 오르는 과정을 외연적으로만 묘사하는데 그치지 않고, 이 과정 전체를 자기실현의 심리적 과정으로 뒷받침함으로써 풍부하고 심오한 상징적 층위를 창출한다.”

이 문장이 과연 ‘드라마 선덕여왕’을 향한 단순한 상찬(賞讚)에 그치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인간 선덕여왕’을 향해 있는 것일까? 판단은 독자의 몫이다.

  ▲ 경주시 보문동에 자리한 선덕여왕릉.  
▲ 경주시 보문동에 자리한 선덕여왕릉.

◆ ‘첨성대’에서 선덕여왕을 떠올리다

인왕동에서 칼국수로 늦은 점심을 먹고 첨성대를 찾았다.

‘하늘의 별과 달을 관찰한다’는 실용적 의미만이 아닌 ‘미학적 완결성’까지 갖춘 7세기 고대의 건축물이 21세기 현대의 인간을 단번에 매료시켰다.

기단(基壇)으로 사용된 화강암은 천년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도 건재했고, 높이 9m, 밑지름 4.93m·윗지름 2.85m로 설계된 첨성대의 조형미는 ‘완벽’이라 불러도 모자랄 것이 없어 보였다.

기단석 위로 가지런히 쌓인 돌은 한 단이 28개. 이는 천체의 28개 별자리를 나타내고 있다.

가운데 자리한 네모난 출입구엔 창문 아래와 위로 12개의 단이 쌓였다.

이것은 1년이 12개월이란 것을 의미한다고 사학자들은 해석한다.

지척에 첨성대가 바라다 보이는 풀밭에 한참을 앉아 있었다. 자연스레 날개를 편 ‘역사적 상상력’은 선덕여왕이 정치·사회·종교적 우두머리였던 그 옛날 신라로 날아갔다.

그 순간, 서라벌의 쟁쟁한 천문학자와 물리학자들 가운데서도 기죽지 않고 자신의 의견을 거침없이 개진하는 덕만(德曼·공주 시절 선덕여왕의 이름)의 모습을 본 듯도 하다.

자, 당신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선덕여왕은 ‘아름다운 예술 애호가’인 동시에 ‘명민한 자연과학자’이기도 하지 않았을까?

  ▲ 황룡사 역사문화관에 복원·전시된 ‘황룡사 9층목탑’.  
▲ 황룡사 역사문화관에 복원·전시된 ‘황룡사 9층목탑’.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하나’ 불국토 이상사회 구현 ‘황룡사 9층 목탑’

법흥왕(재위 514∼540)의 불교 공인 이후 신라에는 대규모 사찰이 우후죽순(雨後竹筍) 들어선다. 선덕여왕이 통치하던 시절에도 분황사, 영묘사, 법림사, 통도사 등 20여 개의 사찰이 만들어졌다.

역사학자들의 공통적인 지적처럼 신라의 불교는 국가 혹은, 왕의 권력과 뗄 수 없는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 선덕여왕이 가졌던 권위를 짐작하게 만드는 거대한 건축물 황룡사 9층목탑도 그런 연장선상에 있다.

황룡사는 지금의 경주시 구황동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되는 신라 최대의 절 중 하나였다.

진흥왕 14년(553년) 왕이 기거할 새로운 궁궐을 짓던 중 어두워진 하늘에서 황룡이 나타난다. 숭배 받는 동물의 출현을 신기하게 여긴 왕은 궁을 만들던 자리에 사찰을 지으라고 명령했고,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황룡사다. 자그마치 2만5천 평에 이르는 거대한 가람(伽藍)이었다.

선덕여왕은 바로 이곳에 드높은 목탑을 축조한다. 황룡사 9층목탑이 세워질 당시 공사현장의 총감독이 김춘추의 아버지 김용춘이었다는 것은 이 프로젝트가 가진 무게감을 보여준다. 모두가 알다시피 김춘추는 후에 삼국통일의 밑그림을 그리는 태종무열왕이 된다.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하나’로 불리는 황룡사 9층목탑은 선덕여왕 12년(643년) 당나라로 유학을 다녀온 승려 자장(慈藏·590~658)의 건의로 만들어졌다. 연구자들은 변방 아홉 국가의 침탈로부터 신라를 지키고자 하는 의지를 담기 위해 탑을 9층으로 설계했다고 말한다.

문헌과 학자에 따라 탑의 높이는 조금씩 다르게 이야기된다. 하지만 80m 안팎이었을 것이란 게 중론이다. 현대적 건설장비 하나 없던 1천400여 년 전에 그 정도 높이의 목탑을 만들 수 있었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탑의 꼭대기에선 당시 서라벌 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보였을 터. 최고 통치권자였던 선덕여왕이 황룡사 9층목탑을 오르지 않을 이유가 없었을 것이다. 수많은 신하를 거느리고 황룡사로 행차한 여왕의 모습은 어땠을까?

경상북도가 간행한 ‘신라의 불교 수용과 확산’은 황룡사 9층목탑의 축조가 가지는 의미를 이렇게 설명한다.

“왕실의 권위 강화와 외침의 저지라는 목적 속에 건립된 황룡사 9층목탑은 ‘신라 땅에 불국토’라는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신라 불국토의 관념으로 확대되었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황룡사 9층목탑을 볼 수 없다. 만들어진지 50년 후 벼락에 맞아 파손된 뒤 여러 차례 중수됐으나, 1238년 몽골군에 의해 완전히 불태워진 탓이다.

현재는 경주시 구황동에 자리한 황룡사 역사문화관에서 1/10로 축소·복원된 9층목탑만을 만날 수 있을 뿐이다.

/홍성식기자 hss@kbmae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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