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연서원의 문루, 현도루.

‘무이산이 기이하고 빼어나며 맑고 고와 진실로 천하에 제일이다. 또 우리 주 선생이 도학을 공부하던 장소가 되어 만대의 아래가 수사와 태산처럼 우러르게 하니 진실로 우주 사이에 다시 있을 수 없는 땅이 된다. 내가 외진 곳과 늦게 태어나서 이미 선생의 문하에서 배울 수 없고 또 구곡의 하류에서 갓끈을 씻을 수 없으니 어찌 심히 불행이 아니겠는가’(‘무이지발’, 정구)

성주 가야로를 타고 가다 수륜면에 도달하면 새하얀 백매화가 팝콘처럼 나무에 주렁주렁 열린 한 서원을 찾아볼 수 있다.

이곳은 조선의 대학자 한강 정구(鄭逑·1543~1620)의 회연초당이 있었던 장소이자 그를 기리고자 후예들이 세운 회연서원이 자리 잡은 곳이다. 회연초당은 한강 정구가 41세가 되던 해에 고향으로 돌아와 대가천의 귀퉁이에 초당을 재건하고 학문을 강학하던 장소이다. 그는 회연초당의 동쪽 부모님 묘소가 보이는 곳에 망운암을 짓고, 앞뜰에 다수의 매화나무를 심어 백매원을 만들었다.

겸재 정선(鄭<6B5A>·1676~1759)이 그린 ‘회연서원도’에도 대가천 인근의 봉비암, 경회당, 사당, 나무들과 백매원 등이 그려져 있다. 겸재 정선은 마치 하늘에서 내려다본 것처럼 상상을 가미하여 그림을 재구성하는 것이 특징인데, 아마도 청하현감으로 있던 시절 이곳을 다녀갔을 것으로 짐작된다.

주자의 삶을 흠모하던 정구는 직접 무흘구곡을 경영하지는 않았지만, 인근의 아름다운 풍광을 후학들과 거닐며, 그 아홉 굽이마다 이름을 짓고, 의미를 부여하였다. 한강 정구의 ‘무흘구곡가’는 주자의 ‘무이구곡가’에서 차운해서 지은 것으로, 제1곡 봉비암·제2곡 한강대·제3곡 무학정·제4곡 입암·제5곡 사인암·제6곡 옥류동·제7곡 만월담·제8곡 와룡암·제9곡 용추를 노래한 한시이다. 서시까지 포함하여 모두 10수이며, ‘한강집’ 권1에 실려 있다. 이 중에서 제4곡까지는 성주, 나머지는 김천에 속해 있다.

 

회연서원의 경회당.
회연서원의 경회당.

‘무흘구곡가’는 마냥 자연의 아름다움을 노래했다기보다는 그를 통해 학문의 근원을 찾고자 노력하는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지금은 회연서원의 입구에서 ‘영남제일승지 무흘계곡’이라는 표석과 두루마리 형태의 돌에 잘 설명되어 있다. 또한 향현사 뒤로 조성된 데크 산책로를 따라가면 제1곡 봉비암까지 가볍게 산책할 수 있는데, 중간쯤 완연대를 지날 때 세월에 바랜 돌에 새겨진 한시를 찾아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다.

회연서원은 문루인 현도루를 통해 들어간다. 곧 마당이 드러나며, 왼편에 400년이 넘은 노거수 느티나무가 방문객을 반가이 맞이한다. 서원의 작은 출입구를 들어서면 ㄷ자모양의 세 건물을 볼 수 있는데, 본당인 경회당과 고학년의 기숙사인 동재 명의재와 저학년의 기숙사인 서재 지경재가 그것이다. 명의재와 지경재는 한강 정구의 학문적 스승인 남명선생의 사상에서 ‘의’를, 퇴계선생의 사상에서 ‘경’을 가져와 그 이름으로 삼았다고 한다.

경회당은 서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로 맞배지붕에 기품있는 모양새를 지녔다. 한석봉이 썼다는 해서체 현판과 경회당이라 적힌 편액 양쪽으로 미수 허목(許穆·1595~1682)의 글씨 옥설헌·망운암이라 적힌 전서체 편액이 보인다. 왼쪽 측실 퇴보 위에는 자칫 놓치기 쉽게 숨어있는, 허목의 다른 편액 불괴침도 걸려 있다. 경회당은 대양처럼 큰 주자의 학문을 본받는다, 망운암은 기상을 높게 가져라, 옥설헌은 깨끗한 마음을 가져라, 불괴침은 부끄러움이 없는 잠자리라는 뜻으로 풀이된다. 글쓴이만 알아본다는 그림 같은 전서체 아래에 작은 글씨로 적힌 한자가 한눈에 띄는 것은 아마도 당시 주자의 유유자적한 삶과 선비로서 부끄러움이 없는 삶을 추구하던 한강 정구와 그를 따르는 미수 허목의 학문에 대한 진심이 편액들에서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일 것이다.

회연서원의 오른쪽이 강학을 위한 공간이라면 왼편은 사당을 위한 공간이다. 대개의 서원에서 사당은 강학 공간의 뒤쪽에 마련되어 있는데 회연서원의 사당은 특이하게도 일자로 배치되어 있다. 외삼문과 내삼문 안에는 새 사당을 지어 한강 정구와 석담 이윤우를 모셨고, 향현사에는 한강과 더불어 존경받던 지역의 인물이 모셔져 있다. 향현사 뒤쪽 산책로를 따라 봉비암 방향으로 오르다 보면 작은 구사당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유물전시관인 승모각에는 한강 정구의 학문들과 초상화, 문집이나 교지 등이 보관되어 있다.

3월에 찾은 회연서원은 이른 봄날 거닐기에 제법 운치가 있는 장소다. 대가천에서는 맑은 물이 유유히 흐르고, 봉비암과 완연대를 오르며 볼 수 있는 절경도 가슴을 트이게 한다. 서원 주위로 가지마다 팝콘처럼 열린 백매화가 봄소식을 완연히 전하고, 서원 앞마당을 지키고 있는 노거수 느티나무 가지들도 새싹들로 봄맞이에 한창이다. 담장 너머 회연서원의 기와가 매화 향기와 더불어 아지랑이를 따라 아른거린다.

◇ 최정화 스토리텔러 약력 ·2020 고양시 관광스토리텔링 대상 ·2020 낙동강 어울림스토리텔링 대상 등 수상

/최정화 스토리텔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