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규종 경북대 교수
김규종 경북대 교수

청도가 자랑하는 시조 시인 이호우(1912∼1979)와 이영도(1916∼1976)는 남매 사이다. 몇 년 전 여름 그들의 생가를 찾았다가 모기와 각다귀 패거리에 쫓기다시피 한 처참한 기억이 아직도 선하다. 요즘 그분들 생가를 복원했는지 어떤지 모르지만, 처음 생가를 찾았을 당시엔 청도 군정(郡政)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었다.

약간의 인연만으로 문학관을 짓는 비용과 수고로움을 아끼지 않는 지자체와 너무도 비교되는 나른한 자세가 아닐 수 없다. 일례로 구상 시인은 서울에서 출생했으나, 본적이 칠곡군 왜관읍이고, 그곳에서 20년 시작(詩作) 생활을 했다는 이유로 칠곡군은 2002년에 ‘구상 문학관’을 건립하여 운영하고 있다. 왜관에 갈 때마다 부러워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요즘 여러 가지 풀과 나무에 꽃이 피어나고 있다. 사람들의 눈길은 오직 나무에 피어나는 꽃에 집중된다. 벌써 시들어가는 매화와 산수유, 이제 절정을 맞은 개나리와 진달래, 살구꽃, 명자꽃, 목련, 성급한 몇몇이 꽃망울을 터뜨린 벚꽃이 주요 대상이다. 하지만 눈을 내리뜨면 곳곳에 풀꽃이 앙증맞게 피어나고 있다.

지난 2월부터 지치지 않고 얼굴을 내밀고 있는 봄까치풀, 요즘 한창인 광대나물, 민들레, 잔디꽃, 아슬아슬하게 피어나 여린 바람에도 이리저리 흔들리는 꽃다지, 꽃인 듯 아니듯 피어나는 머위꽃, 화사한 유채꽃, 흰색의 냉이꽃과 황새냉이꽃, 너무 작아서 색깔 먼저 보이는 제비꽃! 이 어린 중생 풀꽃들이 곳곳에서 피어나 들판을 화사하게 수놓고 있다.

의상 대사가 ‘법성게(法性偈)’에서 갈파한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의 세계가 우리 주변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펼쳐지는 경이로운 시간이 흐르고 있다. 작은 티끌 하나에 온 우주가 담겨 있다는 ‘화엄경’의 정수를 불과 일곱 글자로 통찰한 선지식(善知識)의 탁견에 무릎을 칠 따름이다. 크고 작음의 경계를 어찌 필설로 다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정황을 이호우 시조 시인은 ‘개화’(1940)에서 기막히게 그려낸다. 스물여덟 살의 패기 넘치는 청춘 이호우의 섬세하고 아름다운 심성과 기막힌 눈길이 포착하는 개화의 순간! “꽃이 피네 한 잎 한 잎 한 하늘이 열리고 있네/ 마지막 남은 한 잎이 마침내 떨고 있는 고비/ 바람도 햇빛도 숨을 죽이네 나도 가만 눈을 감네”

하늘 향해 온몸을 열어젖히고 있는 여리고 작은 꽃송이 하나하나를 들여다보며 손에 땀을 쥐는 시인. 모든 꽃잎이 피어나고, 드디어 마지막 잎이 개화에 돌입하는 순간, 시인은 차마 눈을 감아버린다. 시인이 눈을 감기 전에 확인하는 정경은 시인과 함께 개화를 대면하는 바람과 햇빛마저 숨죽이는 것이다. 이런 도저한 시적 인식 혹은 감수성을 어쩔 것인가?!

봄이 오면 꽃이 피는 게 당연하고, 여름엔 열매가 익어 가을에 거두어 겨울에 저장하는 게 당연하다 여긴다. 그러나 당연한 사이사이에 우리가 놓치는 숱한 고비와 난관이 있다. 북풍한설과 모진 강추위에 건조함까지 견디고 피어나는 꽃을 보면서 현대시조 ‘개화’를 떠올린다.